[내일을 열며-김혜림] ‘문찐’ 출산 대책은 헛수고

입력 2017-12-27 17:48

한해를 돌아보며 정리해야 할 시간입니다. 올해는 짧지 않은 세월을 살아온 기자에게도 난생 처음 겪는 일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다사다난(多事多難)한 올 한해를 ‘어떻게 살았나’ 돌아보니 ‘문찐’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대목에서 ‘문재인’ ‘문빠’ ‘진짜 문빠’ 등을 떠올리는 분이 계신다면 역시 문찐입니다. 문찐은 ‘문화 찐따’의 준말로, 문화나 문명에 소외되어 트렌드(유행)를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을 일컫는 신조어랍니다.

우리말과 한자, 외래어, 외국어를 자유자재로 엮은 줄임말에 의미를 담아내는 신조어들. 젊은이들의 날선 시대 비판의식이 담겨 있는 경우가 적지 않지만 기성세대들에게는 낯선 것이 사실입니다. 낯선 것을 즐겨야 하는데 이게 쉽지 않습니다. 인공지능이 탑재돼 사람 말을 척척 알아듣고 실행한다는 똑똑한 가전들이 반갑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면 ‘어버버’ 할 때가 많으니 버거울 뿐입니다. 문찐의 징후지요.

지난주 화요일 밤에는 ‘찌질한 문찐’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강북에서도 재정자립도가 가장 낮은 은평구, 그 중에서도 시간이 지날수록 집값이 떨어진다는 연립에 사는 이웃들이 모였습니다. ‘한 지붕 아래 살면서 너무 무심했다’는 반성으로 시작한 수다는 밤 11시까지 이어졌습니다. 강남 아파트 사는 이들은 꿈도 못 꿀 이웃사촌 파티였지요. 그러나 이날 결론은 ‘우리 연립도 재개발됐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부동산 투기 따위에는 초연해서 북한산 자락에 둥지를 틀었던 게 아닙니다. 강남행의 기회를 놓친 문찐이었던 것이지요. 갑남을녀 문찐들은 그저 재산 증식의 기회를 놓치는 정도이지만 나라를 이끄는 분들이 문찐이라면 매우 곤란할 것 같습니다.

며칠 전 국회의원이란 신분을 내세워 출입금지였던 제천 화재 현장에 들어갔던 자유한국당 권석창 의원. 갑질로 회사 대표 자리까지 내놓아야 하는 게 요즘인데, 세상 돌아가는 것을 정말 모르는 문찐 아닙니까?

뿐만이 아닙니다. 이 나라를 이끌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도 문찐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듭니다. 문 대통령은 지난 26일 청와대에서 열린 제6기 저출산 고령사회위원회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우선은 결혼 출산 육아가 여성의 삶과 일을 억압하지 않게, 여성이 결혼 출산 육아를 하면서도 일과 삶을 지켜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게 가장 중요한 것 같다”고 말입니다. 이 나라의 미래를 좌우할 결혼 출산 육아 ‘삼종 세트’가 아직도 여성의 일이라고 생각하시다니! 이건 ‘무민세대’도 잘 아는 겁니다.

무민세대라 함은 없다는 뜻의 한자 ‘무(無)’와 의미라는 뜻의 영어 ‘mean’에 세대를 붙인 신조어입니다.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을 버리고, 의미 없는 홀가분한 일상을 살고자 ‘무자극’ ‘무맥락’ ‘무위휴식’을 꿈꾸는 세대들을 가리킵니다. 무민세대도 육아는 여성과 남성 즉 부모, 그리고 사회와 국가가 함께 해야 마땅한 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성 혼자 하는 육아를 ‘여성 독박 육아’라고 부릅니다.

정부는 ‘육아 참여 남성에게 각종 인센티브 제공’ 정책을 선심 쓰듯 내놓았습니다. 1960년대생 ‘영자씨’들이라면 눈을 반짝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남녀차별을 감내하며 가사노동에 육아까지 기꺼이 독박을 썼던 슈퍼우먼들이었지요. 하지만 80년대생 ‘지영씨’들은 다릅니다. 슈퍼우먼 엄마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자란 알파걸인 이들은 남성육아휴직 의무화를 원합니다.

“심각한 인구위기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마지막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선 적극적 평등조치(Affirmative Action)가 필요합니다. 대통령 말씀처럼 기존의 저출산 대책의 한계를 과감하게 벗어나야 합니다. ‘출산=여성, 육아=남성’이란 전제 하에서 저출산 정책을 내놔야 할 것입니다. 육아=여성이란 20세기식 문찐 등식을 완전히 버려야 합니다.

김혜림 산업부 선임기자 ms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