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남혁상] 모라토리엄의 추억

입력 2017-12-24 17:51

5년여 전인 2012년 2월 29일 북·미 양측이 합의 사실을 깜짝 발표했다. 북한이 우라늄농축프로그램(UEP)을 포함한 영변 핵활동과 핵실험, 장거리미사일 발사를 중단하고 미국은 상응조치로 24만t의 대북 영양지원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핵심은 북한의 핵·미사일 프로그램 잠정중단(모라토리엄)이었다.

2·29합의는 북·미 양자 간 1994년 제네바 합의, 2000년 북·미 공동코뮈니케 이후 첫 합의였다. 여기엔 미국이 북한을 더 이상 적대시하지 않고, 관계개선 준비가 돼 있다는 문구도 명시됐다. 기자는 당시 워싱턴DC의 한 대학에서 연수 중이었는데, 이는 미국 조야에서 큰 뉴스였다. 미 행정부 내에서도 수년째 공전을 이어가던 북핵 해법의 실마리가 풀리는 것 아니냐는 기대감이 흘러나왔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이런 희망은 한 달여 만인 4월 13일 북한의 장거리미사일 은하3호 발사로 무참히 깨져버렸다. 뒤통수를 세게 맞은 미 행정부 내에서 더 이상 북한과는 대화하지 않겠다는 인식이 굳어진 것도 이때부터였다. 지금까지도 북·미 간 공식적인 1트랙(정부) 접촉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당시 핵·미사일 모라토리엄이 한동안 지켜졌다면, 현재 한반도의 안보 불안지수는 한층 내려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북한의 합의 파기 전례는 남북 간에도 수없이 많다. 북한이 약속을 깰 때마다 명분으로 내세웠던 것이 적대시 정책, 구체적으로는 한·미 연합군사훈련이었다. 북한은 기본적으로 한·미 연합훈련을 북침을 위한 핵전쟁연습으로 규정한다. 1970년대부터 한·미 팀스피릿 훈련(현재 키리졸브 연습) 중단을 요구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남북 또는 북·미의 대결상태를 해소하려면 훈련 먼저 그만두라는 식이었다.

한·미 양국은 북한이 이런 주장을 할 때마다 이를 일축해 왔다. 북한이 남측과 미국을 위협하며 무모한 도발을 계속하는 상황에서 방어적 성격의 합법적인 훈련을 중단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그런 한·미 연합훈련이 최근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 모라토리엄을 위한 레버리지로 등장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내년 2월 평창 동계올림픽 기간에 예정된 연합훈련 일정 연기를 검토할 수 있다고 밝혔다. 미국에도 이를 제안했다고 소개했다. 다만 북한이 추가 도발하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조건을 달았다.

문 대통령이 민감할 수밖에 없는 한·미 연합훈련 연기 카드를 꺼낸 것은 동계올림픽을 통해 북핵 문제의 돌파구를 모색기 위한 출구전략이다. 문 대통령 제안으로 북한이 동계올림픽에 참가하고, 나아가 한반도에서 평화와 화해의 모멘텀을 찾기 위한 시도가 이뤄진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다.

하지만 상황은 그리 간단하게 돌아갈 것 같지는 않다. 우선 이 제안은 북핵 문제의 궁극적인 해법에는 도움이 되진 않을 듯하다. 이미 북한은 국가핵무력 완성을 선언했다. 그들은 헌법에 핵무력·경제병진 노선을 명시하고 시간표에 맞춰 도발 수위를 끌어올리고 있다. 북한은 사실상 핵보유국이고,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기술도 조만간 완성할 것이라는 게 많은 국내외 전문가들 시각이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이 추가 도발을 잠시 중단하는 게 큰 효용성이 있는지 의문이다. 연합훈련 연기 역시 북한에 잘못된 신호를 줄 여지가 많다. 북한은 앞으로 기회 있을 때마다 연합훈련 중단을 요구할 개연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빌미로 남북 혹은 북·미 간 합의는 언제든 깨질 수 있다.

설령 북한이 잠시 도발을 멈춘다 해도 이것을 바로 북한의 전략 수정 또는 태도 변화로 인식하는 것도 현명한 일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도발 중단과 훈련 연기의 등가교환이 아니라 북한을 조금이라도 변화의 길로 끌고 나올 치밀하고 입체적 전략의 수립이다. 북한이 남북 또는 북·미 간 합의를 행동으로 보여줄 것으로 기대하기엔 그들은 지금까지 너무 많은 약속을 깨왔고, 너무 많이 나갔다.

남혁상 정치부 차장 hs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