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노용택] 싸우라고 돈을 줄까

입력 2017-12-22 18:12

최근 인사를 나눈 더불어민주당 A의원은 명함을 뒤집어 뒷면이 보이게 해 기자에게 건넸다. 뒷면에는 후원금 계좌가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다. 지역구를 둔 국회의원은 선거가 있는 해에 최대 3억원까지 후원금을 모을 수 있다. 그런데 후원금을 모을 수 있는 날짜가 1주일 남짓 남은 현재 모금액이 약 9000만원뿐이라고 했다. 그나마 지난달까지 3000만원에 그쳤다가 부단히 노력해 상황이 좀 나아진 것이란다. 그는 “국회의원 대부분이 후원금 기근에 시달리고 있다”고 했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돈 좀 달라”고 대놓고 요구하는 의원들도 있다. 지난해 ‘거지갑’으로 유명세를 치렀던 박주민 민주당 의원은 자신을 ‘돈 달라는 남자’로 칭하며 “돈 좀 주세요”라는 동영상을 SNS에 올렸다. 그 결과 40시간 만에 2억2000여만원을 모금하는 대박을 쳤다. 몸값이 높아진 박 의원은 같은 당 금태섭 의원이 제작한 후원금 요청 동영상에도 출연했다. 조응천 민주당 의원도 후원금 모금 포스터에 박 의원을 찬조 출연시켰다. 박 의원은 “다른 의원들을 돕기 위해 나섰는데, 일부 지지자들은 ‘또 돈을 달라는 거냐’고 오해하기도 한다”고 했다.

국회의원 후원금에는 ‘검은돈’의 유혹에 빠지지 말고 ‘깨끗한 돈’으로 정치활동에 전념하라는 유권자의 격려가 담겨 있다. 개인은 연간 500만원까지 후원할 수 있고, 연간 10만원까지 전액 세액공제로 돌려받을 수 있다. 연말 모임에서 정치 관련 얘기를 하다가 “어차피 돌려받는 돈인데 국회의원에게 10만원 후원을 해보면 어떻겠느냐”고 했다. 그랬더니 “허구한 날 싸우기만 하고 일은 안 하면서 세비를 올린 것도 화가 치미는데 돈까지 달라고 하니 기가 막힌다”는 면박만 돌아왔다.

국회 상황을 보면 그런 소리가 나올 만도 하다. 여야는 주요 입법과제를 처리하겠다며 지난 11일부터 23일까지 임시국회를 열었다. 그러나 막상 임시국회가 시작되자마자 국회의원들은 앞다퉈 해외로 떠났다.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의 상임위 처리를 보류한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13∼20일 일정으로 미국 하와이와 일본 미군기지 등을 방문했다. 노동계와 정치권의 이견으로 법안 처리에 진통을 겪고 있는 근로기준법 개정안 논의를 위해 한국노총 지도부가 지난 14일 민주당을 방문했지만 소관 상임위인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홍영표 위원장은 전날 스리랑카로 출장을 떠난 상태였다.

개헌 논의를 지속하기 위해 연말 종료되는 국회 개헌특위 활동기한도 연장해야 한다. 그러나 내년 6월 지방선거 때 개헌 국민투표 동시 실시 여부를 두고 여야가 공방만 거듭하며 시간을 보냈다. 여당이 임시국회 내 처리를 주장했던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 설치법, 국가정보원법 개정안 등 개혁입법은 아예 논의 테이블에 오르지도 못했다. 오히려 임시국회 최대 이슈는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의 아랍에미리트(UAE) 방문 의혹’이 됐다. 국회 운영위와 법사위가 잇달아 열렸지만 법안 심사는 뒷전인 채 의혹 제기와 반박만 오갔을 뿐이다. 국민들이 ‘어차피 돌려받는 10만원’도 왜 안 주려고 하는지 정치권은 깊이 반성해야 한다. 국민 입장에서도 힘내서 열심히 싸우라고 ‘격려의 돈’을 줄 수는 없지 않나.

노용택 정치부 차장 nyt@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