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속 적폐를 넘어] 그 교수는 지금도 폭력을 휘두르고 있다… ‘의료계 갑질’ 파문 이후

입력 2017-12-21 18:51 수정 2017-12-28 20:17

지난 10월 지방의 A대학병원에서 정형외과 2년차 전공의가 수술 도중 지도 교수에게 뺨과 머리 등을 맞았다. 부산대병원 전공의 폭행 사건이 사회적 이슈가 된 지 이틀 지나서였다.

교수는 실수를 했다는 이유로 전공의의 뺨을 때리고 머리를 두 차례 세게 때렸다. 전공의는 머리 맞을 때의 충격으로 시야가 흐려지는 부상을 입었지만 과에서는 해당 교수에게 시말서를 쓰게 하는 데 그쳤다. 맞은 전공의는 여전히 폭행 교수와 같이 일하고 있다. 교수는 되레 “네가 이런 실수를 하니까 맞을 만했다”며 타박했다. 해당 교수는 3년 전부터 병원 내에서 ‘유일무이한 존재’로 불리며 전공의를 상습 폭행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간호사들 앞에서 뺨을 때리거나 환자 앞에서 머리채를 잡기도 했다. “너 같은 XX는 의사될 자격도 없다. 그만둬라”는 폭언은 일상이었다. 교수는 전공의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심심찮게 ‘한 달 원내 대기’를 벌로 주곤 했다. 한 달간 병원 밖에 나가지 못하게 된 전공의들은 이발도 못하고 옷도 갈아입지 못했다. 병원은 뒤늦게 이 교수를 징계위원회에 회부했다.

수도권 B대학병원 산부인과에서 전임의(펠로우·전문의 취득 후 교수가 되기 위해 낮은 보수로 근무하는 의사)로 일하는 C씨는 지난 8월 산부인과 시술실에서 D교수에게 주먹으로 폭행당했다. 난소 양성종양 흡입 시술을 하던 중 환자 앞에서 머뭇거렸다는 이유였다. C씨가 민원을 제기했지만 병원 측은 해당 교수에게 엄중 경고하는 걸로 마무리했다.

고귀한 생명을 다루기 때문에 다른 직업군보다 더 철저한 윤리의식이 필요한 집단이 의료인이다. 하지만 병원 내에서 지도교수와 전공의, 교수와 전임의, 선배 전공의와 후배 전공의, 선배 간호사와 후배 간호사 간 폭언과 폭행이 다반사로 행해지고 있다.

21일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의 ‘2017년 전공의 수련 및 근무환경 실태 조사’에 따르면 전공의의 71.2%가 언어폭력, 20.3%는 신체폭력을 당한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해자의 대다수가 지도교수나 선배 전공의들이었다. 대한전공의협의회(대전협)가 지난해 9월부터 지난 8월까지 접수한 전공의 폭행 민원 27건을 조사해 가해자별로 분류한 결과 교수 11건, 선배 전공의 6건, 전문의(과장 포함) 5건, 보호자·환자 4건, 기타 1건이었다.

많이 드러나진 않았지만 간호사 간에 벌어지는 폭력도 상당하다. 지난 6월 서울대병원에서는 10년차 이상 간호사가 비슷한 연차의 간호사에게 “제대로 배운 게 뭐냐”는 폭언을 퍼붓고 볼펜으로 머리를 수차례 찔렀다. 자신이 센터에 더 오래 있었다는 이유로 일종의 ‘텃세’를 부린 것이었다. 피해 간호사가 참다못해 관리자인 팀장에게 호소했으나 어떤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다. 피해 간호사의 남편이 보다 못해 노조에 찾아와 신고했다.

다른 병동에서는 발령받은 지 한 달도 안 된 신규 간호사의 어머니가 간호본부로 찾아와 “‘프리셉터’(Preceptor·신규 간호사를 교육하는 간호사)가 등을 때리고 막말을 심하게 한다”고 호소해 가해자를 다른 병동으로 이동시켰다. 5년 전 간호사를 그만둔 허모(38)씨도 신규 간호사 시절 프리셉터의 심한 언어폭력에 시달렸다고 털어놨다. “너는 머리에 뭐가 차서 그 모양이냐” “네 어머니는 네가 이러는 거 아냐” 등의 인격 모독적 발언을 셀 수 없이 들었다.

간호사 사이 신체 폭력은 더 교묘하다. 의사처럼 대놓고 폭력을 행사하기보다 둘만 있을 때 볼펜으로 몸을 찌르거나 겨드랑이를 꼬집는 식이다. 한 현직 간호사는 “프리셉터를 즐기는 이도 있다. 초임 때 4년간 프리셉터를 하는 경우도 봤다”면서 “지금의 간호사 폭력·갑질 이슈는 그간 곪은 게 터진 것”이라고 했다. 허씨는 “이런 폭력을 보고 배운 간호사들이 나중에 프리셉터가 돼서 똑같이 행동한다”며 “일종의 대물림”이라 했다.

‘폭력 대물림’은 전공의들에게도 해당된다. 지도교수의 폭행을 목격하거나 당한 전공의가 폭력을 그대로 답습한다. 서울소재 모 병원에서는 3년차 선배 전공의가 ‘일을 못한다’며 1년차 전공의를 상습 폭행하다 적발됐다.

의료계 폭력 대물림의 고리가 끊어지지 않는 이유는 오랜 도제(徒弟)식 교육 관행 아래 피해자는 속으로 앓기만 하고, 가해자는 잘못하고도 솜방망이 처벌만 받는 환경에 있다. 24시간 바쁜 전공의는 폭행을 당해도 민원을 제기할 짬을 마련하기조차 벅차다. 이승우 대전협 부회장은 “민원을 넣기 위해 증거 자료를 모으라고 안내하면 ‘그 시간에 잠을 자야 한다’며 참는 게 현실”이라고 전했다. 백찬기 대한간호협회 홍보국장은 “빅5 병원의 신입 간호사인 딸이 일이 서툴다며 선임 간호사한테 마구 꼬집혀 온몸에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고 한 아버지가 최근 알려 왔다”면서 “제보자는 딸이 불이익을 당할까봐 그 병원이 어디인지 끝내 밝히지 않았다”고 했다. 백 국장은 “이처럼 쉬쉬하는 문화 때문에 의료계 폭력이 근절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글=민태원 최예슬 기자 twmin@kmib.co.kr, 일러스트=이은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