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역사여행] “행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것”… 의병을 이끌다

입력 2017-12-23 00:01
구연영 전도사 (1864∼1907)
조선말 을미의병 구연영은 경기도 광주에서 봉기해 남한산성을 항거지로 삼아 한양 도성의 일본 세력을 몰아내려 했다. 그러나 일본의 막강한 화력과 내부 변절자로 인해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훗날 구연영은 전도사가 된다. 사진은 남한산성 내 군사훈련을 시키던 연무대. 연무대 오른쪽으로 남한산성교회가 보인다.
구연영 등 조선의 유생들은 단발령과 일제 침략 노골화에 맞서 전국에서 의병을 조직하고 봉기했다. 위 사진은 단발하는 모습, 아래 사진은 체포된 의병들.
구연영이 이끈 ‘기독교 구국당’이 일제 침략에 맞서 군중집회를 가졌던 옛 이천관아 터의 현재(위 사진). 구연영 전도사는 이천중앙교회(당시 이천읍교회) 3대 담임을 했다. 현 이천중앙교회(가운데 사진). 이천중앙교회 앞 구연영 구정서 부자의 순교기념비. 교회는 매년 순국추모예배를 갖는다(아래 사진).
구연영의 장남 구정서 전도사
1928년 여름 함경남도 지방 일대가 큰 수재를 당했다. 당시 9월 23일자 동아일보는 ‘관북수해 이재동포구제금 모집’ 사고를 1면에 실었다. 그리고 5면에 구제금 답지현황을 실었다. 숭실중학교 학생 일동, 예수교연합교회 및 기독교청년회, 신흥야소교회, 신흥학교 직원 및 학생 일동, 정주 기독교유년부 등 기독교 교회와 기관 성금이 눈에 띈다.

그 명단을 한참 읽다 보면 경기도 이천군(현 이천시) 오천교회 각평교회 덕평교회가 각기 오십원 육전을 냈다고 나온다.

이천의 세 교회 가운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곳은 마장면의 오천교회다. 나머지 두 교회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오천교회는 매년 ‘구연영 의사 순국기념 추모예배’에 참여한다. 이천중앙교회 신갈교회 도지교회 현방교회 노루목교회 궁평교회 이포교회 양평장로교회 작촌교회 등은 구연영 의사가 목회를 하면서 개척했거나 순회 목회로 성장시킨 곳이다.

구연영은 사대부 출신 의병장이었다.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는 것에 격분, 강력한 무장 투쟁을 전개했다. 그런데 경기도 광주 고향에서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일어선 그가 어느 날 세례를 받았다. 이천 덕평면 덕들교회라는 곳에서였다. 덕들교회는 훗날 덕평교회로 이름이 바뀌었다.

순국선열 구연영의 삶을 찾아 떠나는 여행은 쉽지 않았다. 그와 관련된 자료가 적거나 체계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전도사로 시무했던 ‘안성중앙교회 100년사’에는 인물사진 밖에 없었다. 구연영 관련 교회 사료를 찾기 힘들었었다.

구연영은 한말 독립운동가다. 1896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하고, 전도사가 되어 계몽운동·국채보상운동을 벌이는 한편, 구국회를 조직해 항일사상을 고취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친일단체 일진회 타도에 전력하다가 경기도 이천에서 아들과 함께 일본헌병에 체포돼 1907년 총살당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으며 2014년 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아들은 당시 서울 동대문교회 전도사였는데 아버지를 만나러 왔다 체포돼 함께 사형당했다. 그것도 부자가 그냥 총살당한 게 아니라 칼로 사지가 잘렸고 끝내 총탄에 숨졌다.

1907년 8월 29일자 ‘대한매일신보’ 기사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부자구몰-일병 오십여명이 이천읍 안에 들어와서 예수교 전도인 구연영 부자를 포살하고 그 근처 오륙 동리를 몰수히 충화하였더라.’

앞서 8월 23일자에 ‘이천군에는 예수교인들이 지석장터에서 응고하여 인민을 선동하니 무삼 거조가 있을는지 기세가 굉장하여 배일하는 주의가 있으며…’라고 보도했다.

그해 8월 중순 구연영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 구국당’이 이천 일진회에 맞서 군중집회를 가졌다. 일경은 군병력 투입을 요청했고 무력으로 제압했다. 의병장이었던 구연영이 집회를 이끄는 데 심히 두려웠을 것이다.

전도사가 두려웠던 일제

지난 17일 오후 경기도 이천시 창전동 평생학습센터 앞. 300여년 된 느티나무가 한파를 견디고 있었다. 강추위 속에서도 초등학생 네다섯 명이 느티나무 주변에서 놀고 있었다. 느티나무 앞에는 농구코트가 있었고 그 농구코트 옆으로 팻말 하나가 의미 있는 장소임을 알렸다. ‘이천 관아 터’였다.

‘관아 터는 1907년 의병운동에 대한 일제의 보복으로 읍내와 여러 마을을 태운 이천충화 사건으로 민가 480여채와 객사가 불타고 이후 일본군 수비대가 사용하다가 한일합방 후 일제에 의해 이천경찰서가 동헌 자리에 위치하여 오다가 1950년 전쟁 시 전소되었고 1955년 석조 건물로 재건되어 구 경찰서 건물로 사용되었으며 이후 청소년문화의집이 자리하였다.’ 관아 터 설명 내용이다.

이천관아 즉 이천도호부는 삼남으로 가는 길목을 지키고 백성을 보호했으나 조선말부터 관리들의 부정과 부패가 심해지면서 여타 지역과 같이 이천관아도 공권력 기능을 상실했다. 1905년 조선은 일본에 의해 외교권이 빼앗겼고 관아마다 일본 헌병대가 주둔했다. 그들은 배일 기미가 보이는 곳이면 수비대라는 이름으로 출동해 잔악한 살상을 감행했다. 또 치안 유지를 명분으로 관아 건물 동헌에 식민통치를 위한 근대식 경찰서로 만들어 갔다.

의병장 출신 전도사 구연영은 일경의 블랙리스트에 오른 인물로 요시찰 대상이었다. 구연영은 1907년 6월 고종 강제 퇴위와 대한제국 군대 강제해산 등에 분개, 기독교 구국당 이름으로 민중을 규합했고 비폭력 구국운동으로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그해 여름 이천 장터 집회를 주도했다. 그에 감화된 의병들도 일어섰다.

당시 구연영 제거를 요청했던 친일단체 이천 일진회의 기록. ‘서울 동편의 10여 군에는 구연영만 없애면 항일운동 하는 자도, 의병도, 기독교도 일시에 없어질 것이다.’

일제는 구연영을 관아 앞 장터(현 이천전통시장으로 추정)로 끌고나가 홰나무에 매달아 본보기를 삼았다. 구정서는 스물다섯 나이였다. 마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형국이었다.

그 끔찍한 현장을 목격한 민중 사이에 이런 말들이 오갔다. ‘그들 부자가 죽던 순간 별안간 뇌성벽력과 함께 폭우가 쏟아졌다. 사람들은 의인이 억울하게 총살당하였기에 하늘이 진노한 것이라고 말했다.’(이천중앙교회 100년사 101쪽) 또 이 기록은 ‘그날 총살을 집행한 일본 수비대가 그날 오후 남한강 이포나루를 건너다가 의병대의 습격을 받아 전멸했다’는 구술과 문헌을 취합한 내용을 전달하고 있다.

아들과 함께 홰나무에 묶여 순교

앞서 1895년 민비(사후 명성황후) 시해 소식에 울분에 차 있던 전국 각지의 의병들이 창의소 깃발 아래 속속 봉기한다. 유인석 김규식 등이었다. 구연영도 관직을 사직하고 김하락 김태원 등과 이천에 내려와 을미의병이 됐다. 그들은 이천 광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다. 그리고 광주 이현 전투에서 패전하고 만다. 그러나 굴하지 않고 의병을 추슬러 남한산성을 점령하고 거점으로 삼는다.

지난 18일 남한산성 서문. 전날 내린 눈과 강추위는 병자호란(1636) 당시의 겨울을 실감케 했다. 병자호란 당시 삼전도 치욕으로부터 259년이 지난 1895년 겨울은 어땠을까. 망국 직전의 남한산성에 선 유생 구연영도 한양도성을 바라보며 유린당한 조정과 백성의 처지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구연영과 의병들은 도성 탈환을 목전에 두고 전세가 불리한 데다 변절자가 발생해 퇴각을 해야 했다. 파죽지세의 일본군이었다. 그들은 경북 의성까지 쫓겨 갔다. 그럼에도 의병들은 해산과 봉기를 번갈아가며 레지스탕스처럼 싸웠다. 하지만 모든 것이 힘에 부쳤다.

이듬해 5월 구연영은 고향 광주로 귀향했다. 기독교 역사학자 이덕주 교수(감신대)는 “구연영은 무력투쟁을 통한 항일운동이 더는 실효를 거둘 수 없다는 판단을 하게 됐고 고향에 칩거하면서 자신의 투쟁과 사상을 정리한 후 1897년 2월 스스로 서울 상동교회 스크랜턴 선교사를 찾아가 복음을 통한 구국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고 했다.

그는 1899년 3월 덕들교회에서 세례를 받는다. 그리고 전도사 과정을 마치고 1904년 전도사 직첩을 받고 이천읍교회(현 이천중앙교회) 제3대 담임자로 피택된다. 그가 담임을 맡은 후 소년매일학교인 특신학교가 설립됐고, 교회가 부흥해 여주와 이천구역이 분리됐다. 1908년 서원보(Swearer) 선교사의 본국 보고에 따르면 시흥교인이 162명, 수원 127명, 충북지구 403명일 때 유독 이천지역은 1454명이라고 할 만큼 부흥을 이뤘다. 구연영의 전도 때문이었다.

구연영은 영혼 구원만을 바라지 않았다. 행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확신했다. 일진회와 같이 민족을 배반하는 친일 행위에 대해 죽을 각오로 회개하라고 소리 질렀다.

구연영은 무기를 든 의병장이었다. 다음에 복음으로 무장했다. 이어 십자군 같은 삶을 살았다. 우리 근대사는 구연영처럼 복음으로 무장한 순국선열이 숱하다. 하지만 우리 교과서는 ‘특정 종교’라는 이유로 기술하기조차 꺼려한다. 구연영도 그중 한 명이었다.

‘의병장 출신 순국열사 구연영 전도사’라고 기록되는 게 정확한 역사 서술일 듯싶다.

구연영 가문의 신앙

목회자 4대째 배출해 구국 신앙 계승


구연영의 장남 구정서 전도사는 아버지와 함께 순교했다. 차남 성서(1894∼1969)는 아버지와 형이 순교당할 때 13세였다. 그 역시 독립운동을 하다가 옥고를 치렀다. 협성신학교를 마치고 경기 남동부와 강원 지역에서 목회를 했으며 이천중앙교회 담임도 했었다. 반민족행위자 정춘수 목사에 항거해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또 해방 직후 국회의원을 지냈다.

구연영의 4남 종서도 차남 성서와 비슷한 길을 걸었다. 그는 현 충주 효성교회 설립자이기도 하다. 부흥운동과 태극기 보급운동에 앞장섰다.

3대 구장회 목사는 구종서 목사의 넷째 아들이다. 1952년 아버지 소천 후 고아원에서 자랐고 서울신대를 졸업했다. 청주 내덕교회 등에서 목회를 했으며 신앙서적 25권을 집필했다. 그의 아들 구자민 4대 목사는 미국 포틀랜드성결교회에서 시무하고 있다.

이천·광주=글·사진 전정희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