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필 떠나는 지휘자 성시연 “오케스트라의 원동력은 사람”

입력 2017-12-20 05:02
지휘자 성시연이 지난 6월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회에서 브루크너 교향곡 7번을 지휘하고 있다. 경기필 제공

햇볕에 눈이 녹아내리던 18일 오후 경기도 수원 경기도문화의전당 대극장. 지휘자 성시연이 섬세한 몸짓으로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리허설을 이끌고 있었다. 그의 손길 속에 브람스 이중 협주곡의 부드러운 선율이 울렸다. 국공립오케스트라 첫 여성 상임지휘자로 임기 4년을 채우고 이달 말 경기필을 떠나는 그를 리허설 직후 만났다.

“곧 떠난다는 생각에 아쉽다가도 리허설을 하면 잊어요. 음악이 아쉬움도 중화시켜주나봐요. 고별을 앞두고 연습을 할 때마다 이 아쉬움도 엷어지는 것 같아요.” 그는 미소를 머금고 담담하게 말했다. 성시연은 임기 동안 경기필의 기량을 최고를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원동력은 ‘사람’입니다. 경기필이 좋은 오케스트라로 평가받는다면 그건 저 혼자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거죠. 해외투어 음반녹음 초청공연 등을 제가 처음에 목표로 세웠더라도 단원들이나 직원들이 저를 믿고 따라오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겁니다. 함께해준 사람들이 참 고맙지요.” 겸손한 리더의 면모를 보여주는 답변이었다.

경기필은 지난 9월 아시아 오케스트라 최초로 무지크페스트 베를린의 초청을 받았다. 경기필과 전당 직원들이 7∼8개월간 이 공연 성사에 매달렸다고 한다. “세계적인 공연장의 초청을 받으려면 연주 기량이 관건인데 그건 지휘자가 단원들을 닦달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저와 단원들이 함께 호흡해야 멋진 연주가 가능하지요.”

그는 그간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꼽으라는 말에 주저 없이 첫 연주회를 들었다. “첫 만남이요. 말러 부활을 연주했어요. 연습을 많이 하긴 했는데 연주 초반엔 경직된 느낌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 단원들과 제가 음악 안에서 하나가 됐어요. 그 연주로 서로에 대한 어색함이 한방에 날아갔죠.” 그의 표정은 연인과 첫 만남을 회상하는 사람처럼 행복해 보였다.

성시연은 2007년 미국 보스턴심포니 오케스트라 최초의 여성 부지휘자로 위촉돼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기도 했다. 어떻게 보수적인 지휘계에서 인정받을 수 있었을까. “‘나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이를 악물고 도전했어요. 열정을 이길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해요. 차별이 있어도 이건 꼭 해내겠다고 다짐하면 결국은 그 길이 뚫리는 것 같아요.”

그는 지금도 어려운 연주를 앞두고 매일 3시간밖에 안 자면서 악보를 연구한다. “악보를 보면 악기 별로 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려요. 더 깊이 잘 해석하기 위해 한 달씩 곡에 매달리기도 하죠.” 그녀가 20일 경기필과 마지막으로 연주하는 곡엔 베토벤의 합창도 있다. “연주가 축복 속에 끝났으면 하는 마음에서 골랐어요. 우리 모두의 꿈과 희망을 빌어주기 위해.”

경기필 공연은 일찌감치 매진됐다. “매진 소식을 듣고 역시 열정은 실망을 시키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웃음). 항상 감동을 주는 음악가가 되고 싶어요.” 그는 내년부터 클래식의 본고장인 유럽으로 무대를 옮긴다. “더 늦기 전에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 상임지휘를 하고 싶은 꿈이 있어요.” 그의 열정이라면 이 꿈도 머지않아 이뤄질 것 같다.

수원=강주화 기자 r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