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읽기] 권력 잡는 ‘트럼프들’… 금권정치 전성시대

입력 2017-12-19 05:00
칠레 대선 결선투표에서 승리한 세바스티안 피녜라 당선자가 17일(현지시간) 수도 산티아고에서 지지자들의 환호에 손을 흔들고 있다. 억만장자인 피녜라는 ‘경제 발전’을 핵심 공약으로 내세워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AP뉴시스
억만장자 피녜라, 칠레 대통령 당선

자산 27억 달러 보유한 갑부
경제성장 내걸고 재선 성공
우크라이나·체코 등서도
우파 기업가들 속속 집권
富者 정치, 민주주의 왜곡 우려

‘억만장자 지도자’가 글로벌 정치의 트렌드로 떠올랐다. 도널드 트럼프(71) 미국 대통령부터 17일(현지시간) 재선에 성공한 세바스티안 피녜라(68) 칠레 대통령 당선자, ‘체코의 트럼프’ 안드레이 바비스(63) 총리까지 갑부 정치인들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장기간 경제 침체와 좌파 정부의 미진한 개혁 성과, 성공한 기업인 출신이 국가경제 역시 성공적으로 견인할 것이라는 믿음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분석된다.

우파 야당 ‘칠레 바모스’(갑시다 칠레) 후보인 피녜라는 대선 결선투표 결과 집권여당인 중도좌파연합 알레한드로 기예르(64) 후보를 꺾고 당선됐다. 피녜라는 2010년 당선돼 4년 임기를 마친 뒤 다시 4년 만에 재집권에 성공했다.

칠레 국민들이 그를 다시 선택한 배경에는 경제성장에 대한 열망이 깔려 있다. 미첼 바첼레트 현 정부 집권 기간 칠레는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2%대에 그쳤다. 주력 수출품목인 구리 시세가 약세를 보인 탓이 컸다. 반면 1기 피녜라 정부 당시 칠레는 연평균 5.3%의 성장률을 보였다.

피녜라는 포브스 추정 27억 달러(약 2조9700억원)의 자산가다. 성공한 경영자 이미지를 적극 활용해 대선 기간 ‘경제 발전과 정권 심판’을 부르짖었다. 특히 법인세 인하와 연금 개편, 140억 달러(약 15조원) 규모의 투자 등을 통해 8년 안에 칠레를 중남미 최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선진국 반열에 올려놓겠다고 공약했다.

양극화와 경제성장, 기득권 정치 심판 등은 지난해 미국 대선에서도 핵심 키워드였다. 억만장자 부동산 재벌 출신인 트럼프 대통령은 금융위기와 일자리 감소 등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기득권 정치를 심판하자며 백인 저소득층을 집중 공략해 당선됐다. 자본주의의 첨단에 선 억만장자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구호로 서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낸 ‘대이변’이었다.

기업인 출신 부자 정치인이 국가 지도자로 추앙받는 경향은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2014년 당선된 우크라이나의 ‘초콜릿 왕’ 페트로 포로셴코(52) 대통령이 대표적이다. 그는 제과업체 ‘로쉔’의 창립자이자 뉴스채널 ‘카날5’의 소유주로 피녜라나 트럼프와 유사한 프로필을 가졌다.

‘원조 억만장자 정치인’은 실비오 베를루스코니(81) 전 이탈리아 총리다. 그는 이탈리아 최대 미디어 그룹 미디어셋과 프로축구팀 AC밀란 등 38개 회사를 거느린 갑부다. 세 번이나 총리직을 수행했고, 탈세와 매춘 혐의 등으로 사임했지만 최근 다시 재기를 노리고 있다.

이밖에 최근 취임한 출판재벌 출신 ‘체코의 트럼프’ 안드레이 바비스 총리, 스위스 ‘반이민법’ 발의를 주도한 극우 억만장자 크리스토프 블로허(77) 스위스 국민당 전 대표 등도 모두 ‘우파·억만장자’라는 교집합으로 묶인다.

다만 일각에서는 부자 정치인들이 국가 지도자로 전면에 서는 것이 금권정치 심화를 부추긴다는 우려도 있다. 미국 싱크탱크 브루킹스연구소의 대럴 웨스트 연구실장은 저서 ‘거부들은 왜 정치권력을 탐하는가’에서 “2012년 미국 대선 당시 소득 상위 1% 부유층의 투표율이 99%였다”며 “부자들의 정치 참여는 근본적으로 자신의 이권 유지를 위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부(富)와 명예의 종착지는 권력’이란 점에서 이들의 부상이 서민들의 열망처럼 사회 발전과 불평등 해소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라는 진단이다.

정건희 조효석 기자 moderato@kmib.co.kr, 그래픽=공희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