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처럼’이라는 말의 무게

입력 2017-12-15 00:01

‘삶은 오늘도 죽음의 서곡(序曲)을 노래하였다. 이 노래가 언제나 끝나랴.’

요즘 떠오르는 시구다. ‘우연히 살아남았다’는 말이 괜한 소리가 아닐 만큼 죽음이 사방을 에워싸고 있지 않은가. 삶에 대한 깊은 관조가 돋보이는 이 시의 주인공은 바로 윤동주다. 그는 섬세하고 꼼꼼한 성격대로 시를 쓸 때마다 원고지 말미에 날짜를 적어두곤 했는데, ‘삶과 죽음’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시에는 1934년 12월 24일이라고 적혀 있다. 겨우 열일곱의 나이에, 그것도 크리스마스이브에 이런 시를 쓰다니.

그랬다. 시인 윤동주가 성탄절을 기리는 방식은 각별했다. 오늘의 우리는 용케 대림절 기간에 맞춰 ‘대박세일’을 홍보하는 상술에 홀려 ‘기쁘다, 지름신 오셨네’를 외치며 백화점과 쇼핑센터를 전전하느라 여념이 없지만 그는 달랐다. 오늘의 우리는 ‘메리 크리스마스’를 빙자해 삼삼오오 ‘주(酒)님’을 영접하기에 정신없거나 혹은 ‘메리 크리스마스’임에도 여전히 옆구리가 시린 자기 처지를 잊으려 인스턴트 오락에 영혼을 팔기 바쁘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에게 성탄절은 예수의 탄생을 기뻐하는 그날은 무엇보다도 예수의 죽음을 묵상하는 날이었다. 만일 십자가의 죽음이 없었다면, 만일 예수가 희생과 몰락의 길을 마다하고 성공과 출세를 택했다면, 예수는 그리스도로 기억되지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같은 날 윤동주는 또 한 편의 시를 썼다. ‘초 한 대’라는 제목의 시다. “초 한 대. 내 방에 풍긴 향내를 맡는다. 광명(光明)의 제단(祭壇)이 무너지기 전. 나는 깨끗한 제물(祭物)을 보았다. 염소의 갈비뼈 같은 그의 몸, 그리고도 그의 생명(生命)인 심지(心志)까지. 백옥(白玉) 같은 눈물과 피를 흘려, 불살라버린다.(중략)”

북간도 명동마을,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크리스마스이브에 적막한 방 안에서 시를 토해내던 윤동주의 눈길이 문득 초에 머물렀다. 자기 몸을 불살라 어둠을 몰아내는 초를 보고 있자니 ‘염소의 갈비뼈’가 생각났다.

이 염소는 물론 성서적 은유다.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뒤집어쓴 채 광야로 쫓겨난 ‘아사셀의 염소’, 곧 예수를 가리킨다. 하여 초에 불을 붙이기 위해 꽂은 실오라기는 그냥 심지(心紙)가 아니다. 기어코 십자가를 지겠다는 굳은 뜻(心志)이다. 역사는 이렇게 자기 몸을 ‘제물’로 바쳐 ‘광명의 제단’을 쌓는 이 덕분에 앞으로 나아간다.

이른바 모태신자요 외삼촌이 세운 기독교 학교와 교회를 다니며 자란 그이니만큼 ‘예수’니 ‘구원’이니 ‘복음’이니 ‘십자가’니 하는 기독교 용어들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었을 텐데도, 윤동주는 이를 자신의 시어로 사용하는 데 매우 인색했다. 그렇게 아끼고 아끼다 딱 한 번 마음껏 풀어낸 시가 ‘십자가’다. 대학 4학년, 그러니까 그의 나이 스물네 살 때 지었다.

‘쫓아오든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敎會堂) 꼭대기 십자가(十字架)에 걸리었습니다’로 시작되는 이 시에서 윤동주는 비로소 직설화법으로 예수를 부른다. 열일곱 살 때 이미 ‘예수처럼’ 살기로 삶의 태도를 정한 그이지만 그로부터 칠 년이 지나는 동안 뼈저리게 느낀 모양이다. ‘예수처럼’ 사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그래서 ‘예수’와 ‘처럼’ 사이에 긴 호흡을 두었다. ‘처럼’이라는 조사를 ‘예수’ 뒤에 곧장 넣지 않고 따로 떼어 아래 행에 독립 배치했다.

기독교인은 무릇 ‘예수처럼’ 살아야 한다고 입이 닳도록 설교하던 기독교 지도자들이 실제로 무슨 짓을 했는지 똑똑히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자기들은 어떻게든 십자가를 피하려고 기를 쓰면서 힘없는 사람들에게 십자가를 떠넘기는 저들의 종교적 위선이 몹시도 혐오스러웠기 때문일 것이다.

‘처럼’이라는 말을 함부로 ‘망령되이’ 입에 올리지 말라고 윤동주는 경고한다. 그러면서 만일 자기 삶에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십자가가 허락된다면//모가지를 드리우고/꽃처럼 피어나는 피를/어두워가는 하늘 밑에/조용히 흘리겠다”고 다짐한다.

이 다짐대로 그는 역사의 십자가 위에서 조용히 산화했다. 꼭 100년 전 이 땅에 태어나 스물일곱 해 두 달을 살고 하늘로 돌아간 ‘영원한 청년’ 윤동주가 그리운 계절이다. 아니 그의 이름을 부르기가 부끄러운 시간이다.

구미정(숭실대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