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자코메티] 사르트르 실존주의에 강한 영향, 그의 작품은 존재에 갇힌 그림자

입력 2017-12-12 22:48

알베르토 자코메티(1901∼1966)는 스위스 태생의 화가이자 조각가이다. 미술에 대해 잘 모른다 할지라도 그의 이름과 조각상은 어디선가 한 번쯤은 듣고 봤을 법할 정도로 유명하다. 보통 자코메티 작품은 ‘현대인의 고독’을 표현하는 실존주의 예술이라고 평가받는데, 이런 평가에 지대한 영향을 준 장본인은 프랑스 철학자 장폴 사르트르이다. 실존주의는 무엇인가. 우리의 존재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각성하고 나를 벗어나는 실존을 살라고 주문하는 철학이다.

이런 실존주의 관점에서 보면 비쩍 마른 인간 군상을 그려내는 자코메티의 조각상들은 불완전한 우리 존재를 훌륭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현대인의 고독’을 다루는 작가라는 자코메티에 대한 평가는 다소 식상한 느낌이 없지 않다. 그렇게 치면 20세기 이후 그렇지 않은 작품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스페인 출신의 작가 피카소도 ‘청색시대’에 자코메티 못지않게 고독한 작품을 제작했고, 미국 작가 에드워드 호퍼도 외롭고 쓸쓸한 도시의 인간들을 그리지 않았던가.

몇 달 전 도쿄에 들렀다가 우연히 자코메티전을 볼 기회가 있었다. 그때 느꼈던 단상은 으레 오가는 ‘고독’에 대한 느낌보다도 집요한 작가의 ‘시선’에 더 가까웠다. 파편적으로 흩어져 있던 그의 작품들이 서로 모여 있으니, 자코메티가 어떻게 인간을 관찰했는지 그 관점이 선명하게 드러났던 것이다. 오히려 자코메티는 현대인의 고독을 드러내고자 했다기보다 역설적으로 그 고독의 진리를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진리는 무엇일까. 자코메티는 “예술도 관심이 있지만 진리에 더 관심이 있다”는 말을 하곤 했다. 이 진술에서 알 수 있듯이 자코메티에게 예술은 진리와 다소 다르다. 그러나 자코메티의 조각상을 예술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예술과 진리를 합쳐놓은 것이 이를테면 그의 작품인 셈이다. 예술을 통해 진리를 추구하는 것, 이 문제가 자코메티의 평생 과업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에게 미술은 ‘보는 방법’이었다. 보는 것이 곧 진리의 문제였던 것이다.

어떻게 볼 것인가. 자코메티의 작업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이 질문이다. 자코메티 전시를 본다면 우리가 되새겨야 할 질문이기도 하다. ‘보는 방법’을 바꿈으로써 우리는 진리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고 자코메티는 믿었다. 궁극적으로 이 질문은 나에 대한 것으로 나아간다. 나에게 없는 것에 대한 질문이 곧 나에 대한 질문이다. 그의 조각이 남겨놓은 가느다란 선은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최소 단위이다. 이 선은 가냘프고 위태롭다. 그러나 그것은 보기에 따라 다른 모습을 가진다.

자코메티의 조각이 말하는 고독은 자유로움을 전제한다. 홀로 있다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뜻한다. 궁극의 자유는 홀로 있음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그 혼자의 삶은 완전하지 못하다. 이 불완전한 상태를 실존이라고 부르든, 고독이라고 부르든, 나의 자유를 저당 잡히지 않고 견딜 수 있어야 한다. 자코메티의 조각은 이 견디는 존재의 순간들을 잡아낸 것들이다. 그래서 그의 조각상들은 끝없이 떨리고 있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자코메티의 작품은 그림자 같은 모양새이다. 태양에 드러난 우리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는 광경을 떠올려보면 쉽게 다가올 것 같다. 존재라는 동굴에 갇힌 우리의 그림자를 자코메티는 보여주려고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 환영을 벗어나서 진리에 다가갈 때 비로소 우리는 불완전한 삶의 경계를 넘어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오늘 퇴근길에 문득 가로등 불빛에 흔들리는 자신의 그림자를 본다면 한 번쯤 자코메티를 떠올려 볼 일이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문화비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