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 건강] 수술≠수혈… 피를 아껴야 생명을 구한다

입력 2017-12-12 05:05
순천향대병원 산부인과 의료진이 여성 환자의 자궁근종 절제 수술을 하며 흘러나온 피를 재활용하는 장비 셀 세이버를 사용하고 있다(왼쪽). 고려대병원에서 무수혈로 다리뼈 암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친 러시아인 아르카디씨가 간호사 도움을 받으며 걷고 있다. 순천향대병원 고려대병원 제공
환자 혈액관리(PBM) 개념 국내서도 급부상

출혈 많은 정형외과·산부인과·암 수술
조혈 촉진제·철분제로 수혈 최소화
혈액 재사용 ‘셀 세이버’도 많이 활용
“저출산·고령화로 피 부족… PBM 필요”
10개 병원선 무수혈·최소 수혈 수술 중


러시아인 아르카디(53)씨는 지난달 중순 한국에서 다리뼈에 생긴 6㎝ 암(대퇴골 종양) 제거 수술을 받으면서 수혈을 전혀 받지 않았다. 외국인 피로 수혈 받는 것에 대해 걱정이 컸던 그는 무수혈 수술이 가능하다는 의료진의 얘기에 귀가 솔깃했다.

수술을 집도한 고려대 안암병원 정형외과 박종훈 교수는 11일 “뼈암 수술의 경우 일반적으로 출혈을 보충하려면 최소 3유닛(팩)의 혈액(적혈구제제)을 넣어줘야 하지만 사전에 수혈대체 치료를 시행해 그럴 필요가 없었다”고 했다. 수술 1주일 전 두 차례 조혈 촉진제를, 수술 2∼3일 전부터는 고용량 철분제를 투여했다. 두 약물 모두 혈액 성분인 적혈구 생성을 촉진한다.

박 교수는 “암 환자는 빈혈이 많기 때문에 헤모글로빈(혈색소) 수치를 검사해서 기준보다 낮을 경우 이를 올리는 치료를 한 뒤 수술에 들어간 것”이라며 “응급 상황에 대비해 2유닛의 혈액을 따로 준비해 뒀지만 쓰지 않았다”고 했다. 암 제거 후에는 수술 부위에 피를 멎게 하는 지혈제를 3시간 동안 넣어줬다. 이를 통해 흘러나오는 피의 양도 3분의 1 아래로 줄였다. 아르카디씨는 빠른 건강 회복세를 보이며 조만간 퇴원을 앞두고 있다.

큰 수술이든 작은 수술이든 출혈이 생기기 마련이고 이를 보충하기 위해 수혈이 이뤄진다. 이처럼 ‘수술=수혈’이라는 의료 현장의 고정관념이 조금씩 깨지고 있다. 수술 전후, 수술 도중에 출혈을 줄이는 여러 보완적 조치를 취해 수혈을 최소화하자는 ‘환자 혈액관리(PBM·Patient Blood Management)’개념이 국내에서도 부상하고 있다.

2014년 창립된 대한환자혈액관리학회(KPBM)를 중심으로 여러 전문 학회들이 수혈의 적정화와 과학적 근거에 기반을 둔 수혈대체 치료 확산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미국과 영국, 호주 등은 수년 전부터 국가 차원에서 PBM을 도입해 혈액 사용량을 크게 줄이는 데 성공했다. 국내에선 고려대병원 순천향대병원 등 10여곳에서 무수혈 혹은 최소수혈 수술을 선도적으로 시도하고 있지만 전체 의료기관으로 보편화되지는 않고 있다.

보건복지부와 질병관리본부는 최근 PBM 개념과 수혈대체 치료 관련 내용을 새로 추가한 ‘국가 수혈 가이드라인’ 개정판을 내고 의료기관 보급에 적극 나섰다.

젊은층 헌혈 감소, 고령층 수혈 증가

PBM은 저출산·고령화에 따라 예상되는 혈액 공급 부족에 대처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 대한적십자사 혈액관리본부에 따르면 지난해 헌혈자는 286만6330명으로 전년보다 7% 줄었다. 4년 연속 증가세였다가 지난해 감소세로 돌아섰다. 국내 헌혈의 73% 정도를 차지하는 10대와 20대 헌혈자가 큰 폭으로 감소한 게 영향을 줬다. 만 16∼19세는 전년보다 12%, 만 20∼29세는 11.7% 줄었다.

요즘 같은 동절기에는 추위와 방학으로 젊은층의 헌혈 감소가 두드러진다. 반면 연말연시에는 건강검진과 연계해 암 등 질병 수술이 많아 혈액 수요가 늘어난다. 11일 0시 기준 혈액(적혈구제제) 보유량은 4.1일분으로 혈액 부족 징후를 나타내는 ‘관심’ 단계다.

엄태현 인제의대 일산백병원 교수는 “헌혈을 많이 하는 10, 20대는 감소하는 반면 수혈을 많이 받는 50대 이상 고령 인구는 늘고 있는 만큼 이에 대비한 혈액 수급 대책이 필요하다. 그중 하나가 PBM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국립암센터 국제암대학원대학 김영우 교수는 “고령화가 되면 암 심장 관절 등의 수술이 늘어난다. 고령 환자들은 빈혈이 많은 데다 혈관 상태가 약하고 지혈 작용이 원활하지 않아 수술 중 출혈될 가능성이 더 높다”면서 “그만큼 수혈 요구량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고 했다.

환자의 안전을 위해서도 무조건적 수혈이 정답은 아니라는 게 전문가들 의견이다. 수혈에 따른 부작용 위험이 상존하기 때문이다. 혈액형이 맞지 않아 발생하는 수혈사고뿐 아니라 혈액형은 문제없더라도 수혈은 남의 피가 몸에 들어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에 따른 면역거부 반응이 나타날 수 있다. 질병관리본부에 의하면 2016년부터 올해 10월까지 수혈 부작용은 2663건 신고됐다. 발열 등 가벼운 증상이 1646건으로 가장 많았고 알레르기(675건), 호흡곤란(92건), 저혈압(26건) 순이었다. 생명이 위험해질 수 있는 급성 폐손상도 4건 있었다. 예전에 수혈로 종종 발생했던 에이즈나 B, C형간염 등의 감염은 검사기법 발달로 많이 사라졌다. 수혈을 최소화하면 이런 위험에서 상당수 벗어날 수 있다.

의료비도 아낄 수 있다. 혈액제제 1유닛(400cc) 제조비용은 60만∼80만원으로 비싼 편이다.

반면 병원에서 혈액제제 1유닛의 처방 비용은 5만원 정도다. 수혈 시 건강보험이 적용돼 암 환자의 본인 부담은 5%(2500원), 다른 질환자는 20%(1만원)로 저렴하다. 수혈 비용의 80∼95%는 국가가 부담하는 셈이다. 수혈을 최소화하면 혈액 관련 의료비용을 줄일 수 있다.

김영우 교수는 “여기에 더해 최근 10년간 수혈이 암 환자의 치료 경과를 안 좋게 하고 수술 후 합병증, 입원기간, 사망률을 증가시킨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환자 혈액 관리의 필요성이 대두됐다”고 말했다. 2015년 국제마취과학회공개저널에 실린 연구 결과를 보면 PBM 도입 시 수혈률(10∼95%), 사망률(68%까지), 입원기간(16∼33%), 합병증 발생률(41%까지), 의료비용(10∼24%)의 감소 효과가 나타났다. 미국은 PBM 도입 후 혈액 사용량이 25%, 영국은 10%, 호주는 41%가량 줄었다.

관행적 수혈, 혈액 부족 초래

반면 한국의 혈액 사용량은 줄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 인구 1000명당 혈액 사용량은 41유닛으로 일본(26.3유닛) 호주(27유닛) 등에 비해 훨씬 많다. 이렇게 혈액을 많이 쓰는 데는 적혈구제제의 건강보험 적용에 제한이 없기 때문이다. 의료기관에서 혈액을 마구 써도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적정한지 평가를 하지 않아 급여 청구액이 삭감되지 않는다. 수혈용 혈액을 많이 쓸수록 환자의 중증도가 올라가는 것도 문제다. 급여를 더 많이 받아 수익을 챙길 수 있는데 병원이 마다할 리 없는 것이다.

순천향대병원 산부인과 이정재 교수는 “정부가 제정한 수혈 가이드라인을 제대로 지키는 의사들이 많지 않다. 과한 수혈이 안 좋을 수 있다는 사실과 효과 좋은 수혈 대체 치료가 개발돼 있다는 것을 잘 알지 못하는 것도 수혈 남용의 이유”라고 말했다.

국가 수혈 가이드라인은 혈액 내 헤모글로빈 수치가 7.0g/㎗ 이하일 때(정상은 13∼14g/㎗) 수혈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지침인 만큼 의무사항은 아니다. 의사는 환자 나이나 체력, 임상적 판단에 따라 달리 적용할 수 있다.

박종훈 교수는 “하지만 상당수 의사들이 1920년대 제시된 ‘헤모글로빈 수치 10.0g/㎗ 이하일 때 수혈 권고’ 가이드라인에 따라 관행적으로 수혈하고 있다”면서 “바뀐 가이드라인(7.0g/㎗ 이하)만 충실히 지켜도 혈액 사용량의 80%를 줄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질병관리본부 용역 연구에서 ‘국가 수혈 가이드라인을 잘 알고 있으며 활용하고 있다’고 답한 의사는 14.9%에 불과했다.

출혈이 많은 척추·관절 등 정형외과 질환, 자궁근종 등 산부인과 질환, 암 수술 등에서 수혈대체 치료가 시도되고 있다. 수술 전 빈혈이 있는 경우 조혈 촉진제나 고용량 철분제를 주사해 이를 보충해준다. 수술 중에는 혈액 회수 및 재주입 장비인 ‘셀 세이버’도 많이 활용된다. 수술 중 흘러나오는 피를 모아 원심분리기로 적혈구 성분만 걸러내 다시 환자에게 집어넣어주는 것이다. 일종의 혈액 재활용이다. 다만 고용량 철분제(1회 주사 15만∼20만원)와 셀 세이버(20만∼30만원)는 건강보험이 적용 안 돼 환자 부담이 크다.

이런 방법을 통해 무릎 관절 및 엉덩이 관절 수술의 경우 수혈률을 22∼97%에서 10% 아래로, 위암은 20%에서 5%대로, 자궁 적출술은 20%에서 5∼10%대로 낮출 수 있다.

이정재 교수는 “예전엔 종교적 이유로 수혈을 안 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요즘엔 수혈에 막연한 두려움을 갖고 있거나 부작용을 미리 알아보고 수혈을 받지 않겠다는 일반인도 느는 추세”라고 했다.

박종훈 교수는 “수혈이 중요한 치료 수단이던 1900년대 만들어진 ‘피가 생명을 구한다(blood save lives)’는 개념이 1980년대까지 의료계를 지배해 왔다. 하지만 근래에는 ’피를 아껴야 생명을 구한다(save blood, save lives·2015년 학술지 네이처에 발표된 논문 제목)’로 수혈 의학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정부는 그동안 헌혈 늘리기 정책에만 몰두해 왔는데 이제부터라도 세계적 추세에 맞춰 적정한 수혈을 위한 의료계 교육과 대국민 캠페인에도 나서야 한다”고 덧붙였다.

엄태현 교수는 “반드시 필요한 수혈을 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다. 의료 기술이 발달하면서 수혈을 대체할 방식이 개발됐으니 의료 현장에서 꼭 수혈이 필요한 상황인지 신중하게 판단해 최적의 치료법을 선택하자는 게 PBM”이라고 말했다.

글=민태원 기자 twmin@kmib.co.kr, 그래픽=전진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