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토 자코메티(1901∼1966)의 작품을 처음 접한 것은 2014년 11월 오스트리아 빈 레오폴트미술관에서였다. 당시 에곤 실레(1890∼1918)에 대한 글을 쓰고 있던 나는 세계 최고의 실레미술관이라고 하는 레오폴트미술관에 들렀다가 마침 이 미술관에서 개최한 자코메티의 특별전까지 관람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다.
온종일 실레와 자코메티의 작품 속에 빠져 있던 나는 그날 밤 실레의 생가가 있는 툴른을 향해 떠났는데, 어두운 창밖을 보며 이 두 작가의 유사성이 마음에 들어왔다. 그것은 실레와 자코메티는 같은 시대, 같은 나라의 작가들이 아니었음에도 예술을 향한 어떤 고집 때문에 지독한 고통을 통과하지 않으면 작품을 만들지 못하는 습성이 있었고, 그 결과 이들의 작품(회화 조각 드로잉)에는 바짝 마르고 앙상한 인간들만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날 내가 본 자코메티의 조각 중 특히 기억되는 작품은 그때까지의 예술 경매가 최고 액수를 기록했던 ‘걸어가는 사람Ⅰ’(1960년 작, 2010년 2월 런던 소더비경매에서 1억416만 달러에 거래됨)의 원본이랄 수 있는 ‘걸어가는 사람’(1947년 작)이다.
1947년은 자코메티 예술의 전환기를 연 중요한 해다. 이 해에 자코메티 예술의 원숙미를 드러낸 실물 크기인 ‘걸어가는 사람’ ‘가리키는 남자’(2015년 5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1억4130만 달러로 경매 사상 최고 조각품이라는 기록을 세움) ‘여인상들’(키 크고 날씬한 여인상들) 등 기념비적인 작품들이 나왔다.
‘걸어가는 사람’은 ‘걸어가는 사람Ⅰ’에 비해 상체를 곧추세운 형태다. 어디론가 걸어갈 준비를 마친 것처럼 보이는 작품이다. 다음 해 만든 ‘빗속을 걸어가는 남자’는 훨씬 보폭이 크고 상체를 기울여 서둘러 걷고 있다. 1960년에 나온 ‘걸어가는 남자Ⅰ’은 이 두 작품의 중간쯤 되는 보폭과 상체의 기울기를 보이고 있다 그 자세는 움직이려는 힘과 내면의 표정까지 보여주는데, 자코메티의 걸어가는 남자들 조각은 부상당한 자신의 발에 대한 미학적 메타포로 보인다. 피라미드 광장을 걸어가던 서른일곱의 자코메티는 술 취한 미국 여인의 음주운전으로 다리를 다쳤다. 수술 후 의사로부터 평생 절룩거리거나 지팡이에 의지해야 할 처지라는 진단을 받았을 때 그는 오히려 기뻐했다고 한다.
자코메티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몇 사람이 있다. 평생 동안 모델이 되어준 동생 디에고 자코메티, 26세 나이에 48세의 자코메티와 결혼한 아네트 암, ‘도둑 일기’의 프랑스 작가 장 주네(1910∼1986), 자코메티보다 열일곱 살 어린 일본인 철학교수 야나이하라 이사쿠, 매춘부 캐롤린 등을 꼽아야 할 것이다.
1951년에 도쿄대학 총장을 지낸 야나이하라 다다오(‘성서강의’의 저자)의 아들로 알베르 카뮈 ‘이방인’을 일본어로 번역한 철학자 야나이하라 이사쿠는 1955년 가을 프랑스에서 자코메티와 만난다. 36세의 철학자였던 야나이하라는 다음 해 봄이 오자 이집트에 들러 일본으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다. 그때 자코메티는 야나이하라에게 자신의 모델이 되어 달라고 부탁을 했다. 자코메티로부터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1605∼1665)가 궁정화가 벨라스케스의 모델이 되어준 것 말고는 인류의 발전에 기여한 바가 없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던 야나이하라는 자코메티를 떠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집트 방문을 연기하고 포즈를 잡기 시작했다. 자코메티의 처음 계획은 일주일 정도 모델을 스케치한 후 일본으로 보내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야나이하라의 귀국은 자꾸만 늦춰졌고 일본에서는 계속 연락이 왔다. 밤새도록 같은 표정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내면의 깊이를 좋아했던 자코메티와 천년 동안이라도 모델을 설 자신이 있었던 오사카대 철학과 교수는 서로 친밀해져 열정적인 집착의 국면에 접어들었다. 자코메티의 전기를 쓴 미국인 제임스 로드의 ‘자코메티, 영혼을 빚어낸 손길’(을유문화사)에 따르면 어느 날 저녁 자코메티는 그림을 그릴 계획이 없다고 말했고, 자코메티의 아내 아네트는 남편의 일본인 친구와 콘서트에 다녀오던 길에 그를 호텔로 유혹해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 날 순진하고 진실하고 싶었던 야나이하라는 자코메티에게 “화가 났느냐”고 물었고 자코메티는 “매우 기쁘다”고 답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날 저녁 작업이 끝난 후 자코메티는 볼 일이 있다면서 부인과 모델을 남겨놓고 떠났고, 아네트는 모델에게 호텔로 갈 것을 제안했다. 그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도 그랬다. 자코메티는 이 둘의 관계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갖지 못한다면 더 어색할 것이다. 나는 매우 기쁘다”고 공언했다. 아네트는 어떤 죄책감도 없이 두 남자를 동시에 사랑할 수 있는 여자였다. 일본에서의 계속된 연락으로 인해 철학교수는 12월 중순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는 자코메티 부부로부터 다음 해 여름방학에 다시 파리로 돌아올 것을 요청받았다. 비행기 요금과 생활비 일체를 제공한다는 조건이었다.
그렇게 몇 년간 이 기이한 우정이 계속되는 사이 아네트는 자코메티에게 진절머리를 냈고, 58세의 자코메티는 21세의 매춘부 캐롤린에게 빠져들었다. 자코메티는 아네트에게 멋진 옷을 사주지 않고, 오히려 더 본질적이라며 삭발을 요구하기도 했지만 캐롤린에게는 수백만 프랑의 다이아몬드 팔찌와 진주목걸이와 승용차를 선물했다. 포주들에게 돈을 뜯기면서도 자코메티는 캐롤린에게는 그만큼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믿었다.
이 특이한 관계가 지속되는 동안 자코메티의 예술은 정점을 찍었다. 스위스 출신의 자코메티가 선택한 나라 프랑스에서는 그를 그리 높이 평가하지 않았지만 해외에서는 딴판이었다. 1955년에 세 나라에서 자코메티의 기념비적인 전시회가 열렸다.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런던 대영제국 예술평의회 갤러리, 독일 세 도시의 미술관 전시회. 그리고 베니스 비엔날레 집행위로부터는 다음 해 6월에 열리는 비엔날레의 프랑스 전시관에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품을 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는 초대받지 않았더라면 더 기뻤을 것이라며 한 나라를 대표하지는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그는 비엔날레의 수상자 후보가 되는 것도 정중히 거절했다. 이 비엔날레에 출품한 작품이 10개의 형상으로 이루어진 ‘베네치아의 여인들’인데, 한국 조각가 유영호의 ‘그리팅 맨(인사하는 남자)’처럼 양팔을 겨드랑이에 바짝 붙이고 서 있는 여성들의 가느다란 작품을 선보였다.
장 주네는 1954∼57년 자코메티의 모델을 한 작가다. 피카소가 자신이 읽은 예술가에 관한 최고의 책이라고 평가한 장 주네의 글 ‘자코메티의 아틀리에’(열화당)는 한 예술가의 창조성이 다른 사람의 창작의 재료가 된, 예술에서 드문 사례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평자들은 자코메티의 예술이 20세기의 불안과 실존적 고독을 표현한 것이라고 했지만, 주네의 평은 누구의 평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절박한 자코메티의 가슴을 열어 보여준다. “자코메티의 작품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 세상이 더욱 더 견딜 수 없어지는데, 그것은 이 예술가가 거짓된 외양이 벗겨진 후 인간에게 남는 것을 찾아내기 위해 자기의 시선을 방해하는 것을 치워 버릴 줄 알기 때문인 것 같다.”
자코메티가 오늘날과 같이 세계 미술사의 거장으로 우뚝 선 데에는 그의 특별한 개성을 빼놓을 수 없다. 자코메티의 서 있는 인물상은 전부 발이 비밀에 싸여 있다. 받침대 위에서 막 걸을 채비를 하고 있는 그의 발들은 뭉쳐져 있는 진흙 속에서 발을 빼내는 듯, 아니면 구름 속에서 나온 듯 신비함으로 싸여 있다. 그의 발은 어느 작품도 팔(八)자형이라고 하는 외측 방향으로 열려 있지 않다. 장 주네는 “그처럼 전설적인 내반족(발이 안쪽으로 휘는 형)에 사로잡힌 마력은 일반적인 생각이 아니다. 나는 바로 이 지점이 자코메티의 장인정신을 모두 찬미하기는 하지만 이유가 정반대로 나뉘는 부분이라고 본다. 그는 머리 어깨 팔 골반으로 우리를 깨우치고, 발로는 우리를 매혹시킨다”고 썼다.
얼핏 보면 자코메티의 삶은 일본인 친구와 아내 아네트, 거리의 여자 캐롤린이 뒤죽박죽 얽혀 있어 무척 무질서해 보이지만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시기에 최고의 작품들이 나왔다는 사실이다. 자코메티의 경우를 보거나 그에게 영향력이 지대했던 다른 예술가들-사르트르, 피카소, 장 주네, 사뮈엘 베케트-의 예를 보면 예술가들의 성취력(예술성)은 현실의 일상적 무게로부터 얼마나 많이 벗어나 있는가 하는 점과 그 벗어난 행동들이 모두 발가벗겨지더라도 그것으로부터도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가 하는 점에 달려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물론 거기에는 엄청난 고통이 수반된다. 그러나 그들의 예술성은 그 고통을 자양분으로 피어난다.
부스스하게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주름진 얼굴, 허약하고 골격만 있는 청동 쪼가리들. 그래서 섬뜩하고 불쌍하게 보이는 인간들. 그의 조각품은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좌대위에 고정돼 있다. 그럼에도 사르트르는 “아무도 (자코메티의 조각보다) 더 멀리 갈 수 없다”고 말했다. 이 불일치는 무엇인가. 한 발자국도 가지 않은 것과 누구보다도 멀리 걸어간 거리, 자코메티는 그 절대적인 거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역동성을 각자가 판단하도록 관객에게 넘긴다.
<소설가·언론인>
‘자코메티’ 결코 걷지 않고도 가장 멀리 가는 사람
입력 2017-12-05 19:26 수정 2017-12-06 0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