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없이 달린 스물아홉 해… 땅끝까지 하나님 사랑 심었다

입력 2017-12-08 00:00
최성자(왼쪽) 박광수 인도선교사 부부. 인도 기독교인들이 한 집회에서 메시지를 듣고 있다. 최성자 선교사 제공
방콕은혜국제학교 학생들이 졸업 기념촬영하고 있다. 1988년 파송 당시의 정석천 신병연 선교사 부부. 정석천 선교사 제공
이용학 최애련 가나선교사 부부가 1988년 강남중앙침례교회에서 파송받고 있다. 오른쪽은 선교사 부부. 이용학 선교사 제공
육호기 원로 선교사. 한인 선교사들이 1988년 미국 시카고 빌리그레이엄센터에서 열린 제1회 한인세계선교사대회를 마치고 기념촬영하고 있다. 육호기 선교사 제공
국민일보는 1988년 창간돼 '복음 실은 일간지'로서 다양한 역할을 다하고 있다. 국민일보와 동년배 격으로 같은 해 파송, 해외에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은 현지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을까. 아시아 아프리카 선교사 3명을 온라인으로 연결해 그간의 삶과 열매, 기도 제목을 들어봤다. 또 같은 해 첫 한인세계선교사대회를 주최한 1대 회장을 만났다.

최성자(52·여) 인도 선교사는 88년 2월 성결대를 졸업하고 8월 결혼한 후 남편 박광수(57) 선교사와 함께 헌신했다. 처음에는 영국과 필리핀에서 사역했다. 고국에 들어왔을 때 한국에 일하러 온 인도 노동자를 만나 인도 선교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래서 찾은 곳이 인도 첸나이였다.

첸나이는 인도에서도 오지였고, 여성을 천대하는 문화에 충격을 받았다. 인도는 힌두교도 82.8%, 회교도 11.7%, 기독교도 2.3%였다. 기독교인 박해도 심했다. 최 선교사 부부는 그러나 굴하지 않고 현지 목회자 훈련을 시작했다. 목회대학원을 세웠고 현재 3개 학교에서 목회자 100여명을 훈련하고 있다. 사모대학도 세웠으며 가정사역과 인도 타밀어 찬양사역도 하고 있다. 타밀어 찬양 DVD를 2집까지 발매했다. 또 1000개 교회 개척 및 건축을 목표로 사역을 시작해 현재 40개 교회를 건축했다.

처음 인도에 도착했을 땐 아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 인도에 가자마자 자신들을 파송한 한국의 교회는 후원을 취소했다. 당장 거주할 집을 얻기도 힘들었다. 최 선교사는 “‘인도는 아닌가 보다’며 돌아서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 인도 선교를 강권적으로 이끄셨다”고 말했다.

인도 정부는 기독교 선교사에게 비자를 내주지 않는 방법으로 종교 탄압을 하고 있다. 최 선교사는 “인도 선교사 500가정 중 이미 300가정이 인도를 자의 또는 타의로 떠났다”며 “하나님께서 인도의 정치 상황에 깊숙이 개입, 선교의 길이 활짝 열리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 선교사는 자신이 선교사로 파송된 해에 창간한 국민일보에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었다. 그는 “국민일보는 한국교회의 등대”라고 평가했다. 이어 “많은 성도들이 국민일보를 보며 선교에 대한 비전을 잃지 않았다”면서 “앞으로 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선교 매체가 되길 축복한다”고 말했다.

정석천(61) 태국 선교사는 GP선교회 전신인 한국지구촌선교회가 파송했다. 1985년 7월 한 선교대회에서 태국에 어린이 사역자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태국 선교를 결심했다.

당시 태국에선 십자가 달린 교회를 보기 어려웠다. 개신교 비율이 전체 인구의 0.2% 정도였다. 나라 전체가 불교문화로 꽉 차 있었다.

정 선교사는 처음 1년간 언어 훈련을 받았고 태국 주일학교를 깨우기 위해 교사대학을 열었다. 어린이 성경캠프도 했다. 이어 태국주일학교연구원을 설립했고 이곳을 통해 교사 훈련과 어린이 및 청소년 캠프를 지속적으로 진행했다. 미국 토머스로드침례교회의 주일학교 교재 50여권을 번역 출간했고 교사 훈련용 책자도 발행했다. 2000년, 2008년엔 태국에서 기독교 교육을 위한 콘퍼런스를 주최했다. 1만여명이 참석했다.

앞서 1999년엔 문 닫은 상업전문대학을 인수해 방콕은혜국제학교와 방콕은혜학교를 세웠다. 이곳을 전진기지 삼아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다. 학교가 운영하는 토요골목주일학교에 많게는 매주 440여명의 아이들이 참석한다.

앞으로 방콕 람캄행 지역에 교육센터를 세울 계획이다. 이곳에서 언어학교, 음악학교, 직업훈련 등을 진행할 예정이다. 방콕은혜국제학교와 방콕은혜학교의 사역 확대를 위해 새로운 부지가 필요한 상황이다. 또 정규 유치원 교사를 양성하는 사범대학 설립도 시급하다. 정 선교사는 이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용학(60) 가나 선교사는 1974년 ‘엑스플로74’ 성회에서 선교사로 결신했다. 이후 군에서 부상을 입어 6개월간 치료 받으면서 주님과 더 깊이 교제했고 이때 구체적인 선교사 소명을 받았다. 그는 88년 강남중앙침례교회의 파송을 받아 가나에 정착했다.

당시 가나는 군사독재로 선교사 비자 받기도 쉽지 않았다. 복음화율은 아프리카의 다른 나라에 비해 높은 편이었으나 제자 양육 등은 거의 전무했다. 이 선교사는 원주민들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살기 시작했다. 전기·수도는 없었다. 1992년 6세 딸이 말라리아로 숨졌다. 이 선교사는 “가나를 떠나려 했지만 그때 꿈속에서 딸이 나타나 아프리카를 떠나지 말고 복음을 전해달라고 부탁해 지금까지 사역하고 있다”고 회고했다. 현재는 교회 개척과 농업기술학교 사역을 하고 있다. 또 가나 인근에 있는 부르키나파소와 말리에도 진출, 교회를 세우고 선교활동을 펼치고 있다.

주로 제자훈련을 위해 신학교 사역을 하고 기독교문화 사역, 목회자 및 대학생 콘퍼런스 등을 통해 직간접적으로 복음을 전한다. 부르키나파소는 불어권으로 처음에는 불어 한마디 못하고 진출했는데 지금은 많은 열매를 맺고 있다고 말했다.

이 선교사는 ‘비전 21’이라는 목표를 갖고 있다. 서북아프리카와 중앙아프리카의 불어권 나라 21곳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는 “국민일보의 응원이 필요하다”며 “국민일보는 회개하라고 외치는 광야의 소리로 마지막 때 주님의 소리를 대변하는 정론지가 돼 달라”고 부탁했다.



1988년은 한국 선교 역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이다. 각국에 흩어져 사역하던 선교사들이 한인세계선교사회로 뭉쳐 첫 대회를 시작한 해다. 이때부터 한국 선교사들이 갖고 있는 선교자원을 고려해 효과적인 선교전략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첫 대회는 미국 시카고에서 열렸다. 한인 선교사 500여명이 빌리그레이엄센터에 모였다. 이후 4년마다 대회가 열리고 있다.

첫 대회를 주관한 1대 회장 육호기(73) 선교사를 최근 한국에서 만났다. 그는 1976년 파송된 첫 유럽 선교사로 독일에서 사역하다 최근 안식년을 맞아 한국에 들어와 있다. 원로 선교사인 그는 “지금은 우리 선교사들이 현지에서 선교를 주도할 게 아니라 조력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며 “선교사역을 현지에 이양한 후엔 한국에서 외국인 노동자를 대상으로 선교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육 선교사는 “처음 선교사로 파송될 땐 아무것도 몰랐지만 지금은 원로로, 전문가가 됐다”며 “국민일보도 이제 한국을 넘어 세계의 대표 기독정론지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