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이효성] 방송언어 품격 있어야

입력 2017-12-04 17:51

1443년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이후 한글은 570년이 넘는 기간 크고 작은 어려움을 겪어 왔다. ‘언문’ 등으로 불리며 한자에 비해 열등한 문자라는 천시를 받기도 했고, 일제 강점기에는 한글 말살 정책을 견뎌내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글을 지키기 위한 선조들의 끈질긴 노력의 결과 오늘날 한국인은 한글이라는 과학적이고 수준 높은 문자를 사용할 수 있게 됐다.

한글의 큰 장점은 그 배움과 사용이 쉽다는 점이다. 이는 디지털 매체 이용 환경에서 더욱 부각되고 있다. 알파벳으로 기입한 뒤 다시 한자로 변환해야 하는 중국어, 일본어와 달리 한글은 자음과 모음을 조합해 편리하게 입력할 수 있어 휴대전화 같은 디지털 단말기를 통해 수월하게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다. 또한 최근 한글의 기능적인 측면뿐 아니라 형태가 갖고 있는 고유의 아름다움 역시 주목받고 있다. 한글이 적혀 있는 티셔츠나 그림문자(캘리그래피)를 거리 등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한글의 뛰어난 특성은 해외에서 더욱 평가받고 있다. 영국 라우틀리지 출판사는 2011년 ‘언어와 언어학의 50대 사상가’로 플라톤, 소쉬르 등과 함께 세종대왕을 선정한 바 있으며 세계적 언어학자 제프리 샘슨 교수는 한글을 “신이 인간에게 내린 선물”이라고 극찬한 바 있다.

그런데 최근 배움과 사용이 쉽다는 한글의 장점이 오히려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무분별하게 사용되고 있는 신조어나 문법 파괴 등의 현상이 바로 그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소위 ‘야민정음’ ‘급식체’ 등으로 통칭되는 청소년들의 언어 사용 현상을 들 수 있다. ‘띵작’(‘명작’을 변형해 표기), ‘커엽다’(‘귀엽다’를 변형해 표기) 등 기존 자음·모음 문법체계를 벗어나 표기하는 경우나 단어 말미에 벌레를 뜻하는 한자 ‘∼충(蟲)’을 붙여 특정 집단을 모욕하는 것은 청소년의 언어 사용 현상을 단순한 언어유희로 가볍게 보기 어려운 지점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청자 특히 청소년들의 언어 순화를 위한 방송의 역할은 여전히 중요하다. ‘2016년 청소년 매체 이용 및 유해환경 실태조사’에 따르면 청소년의 85.9%가 주 1회 이상 지상파 TV를 시청하고, 73.3%는 주 1회 이상 유료방송 채널을 시청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바른말 사용을 통해 국민의 품격 있는 언어생활에 이바지하는 방송의 공적 책임 수행 필요성이 여전히 높은 것이다.

방송언어 순화를 위해서는 방송사와 규제기관 공동의 노력이 중요하다. 방송통신위원회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와 함께 방송언어 순화를 통한 고품격 방송 콘텐츠 육성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2015년 9월, 제작자와 출연자 등이 우리 방송 제작 현장에서 실제 활용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담은 ‘방송언어 가이드라인’을 제작해 배포한 바 있다. 올해에도 방송사들의 협조로 청소년 언어순화 자막고지를 상·하반기에 시행했으며,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이달 중 청소년 언어문화 개선 프로그램을 제작·송출할 계획이다. 앞으로도 방송통신위원회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와 함께 방송언어 품격 향상을 위해 더욱 힘쓸 예정이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대표적 사상가인 하버마스는 ‘인간은 언어를 통해 생활세계에서 개인으로 형성되며, 또 그 생활세계는 구성원들의 소통을 통해 재생산된다’고 지적했다. 즉 일상에서 우리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자신과 그가 속한 집단의 정체성을 확립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 언어 사용에 방송이 미치는 영향이 여전히 작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면 방송언어는 사회 전체에서 공유되고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기여하는 사회적 언어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스마트미디어 시대라 불리는 현재에도 품격 높은 언어문화 확산을 위한 방송의 역할이 여전히 요구된다 하겠다.

이효성 방송통신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