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4월 충남 부여박물관으로 다급한 전화가 왔다. 누군가 옛 무덤을 도굴하고 있다는 제보였다. 돌 뚜껑을 들어낸 무덤에선 청동검 돌검 화살촉 옥목걸이 등 무려 33점이나 나왔다. 계급 사회로 분화된 청동기 시대, 무덤 주인의 위세를 보여주는 부장품이었던 것이다.
한반도 청동기 역사를 새로 쓴 부여 송국리 유적이 탄생하던 순간이다. 그날의 제보로 시작된 1호 돌무덤 발굴 이후 지금까지 43년간 22차례 발굴 조사가 이뤄졌다. 국립중앙박물관 공주박물관 부여박물관 전통문화대학교 등 발굴 주체가 달라지면서 같은 유적지에서 나온 문화재임에도 소장처가 달랐다. 이산가족처럼 흩어졌던 송국리 유적이 40여년 만에 한자리에 모였다. 충남 국립부여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특별전 ‘부여 송국리’에서다.
지난달 30일 찾은 전시장은 그날의 제보 사건을 시각화하는 동영상으로 들머리를 장식해 관람객의 호기심을 한껏 자극했다. 송국리 유적이 왜 중요한지 시각적으로 비교적 쉽게 잘 풀어냈다.
이곳에서 나온 출토품은 기존 학설을 뒤엎었다. 송국리 1호 돌무덤에선 간돌검과 함께 요녕식 청동검이 나왔다. 일제 식민사관은 한반도에는 청동기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청동 도끼 거푸집까지 나와 청동기를 자체 제작하는 등 한반도 청동기 문화가 찬란하게 존재했음을 보여준 것이다.
송국리 유적은 집터 무덤 토기 도구 등을 통해 이전과 달라진 청동기 중기(기원전 850∼ 기원전 450)의 양상을 보여준다. 화전민처럼 이동하며 밭농사를 짓던 한반도의 선조들은 송국리 단계에 와서는 벼농사를 지으며 한마을에 정착해 대를 이어 살았던 것이다.
‘청동기 판 뉴타운’도 있다. 경사진 곳에 인위적으로 흙을 메워 토목공사를 한 흔적이 여러 군데서 발굴됐다. 주춧돌을 놓고 지상식 건물을 지은 건물터인데, 농사기술의 발달로 생겨난 잉여작물을 공동으로 보관했을 장소로 추정된다.
핵가족 단위 삶을 영위했음을 보여주는 작은 원형(지름 5m) 집터도 송국리만의 특징이다. 이전까지는 보다 넓은 사각 형태 집에서 대가족을 이뤄 살았던 것이다. 수확량이 쑥쑥 늘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는 유물도 있다. 날이 한쪽만 있는 반달형 돌칼을 쓰지 않고 진화된 도구인 양날 삼각형 돌칼이 출토된 것이다. 양쪽으로 나락을 벨 수 있어 농업생산량 향상에 크게 기여한 도구다. 같은 모양의 토기도 한꺼번에 나오는 등 수공업체제도 갖춰졌다.
송국리에서는 독을 관으로 사용한 돌널 무덤 등 여러 형태의 무덤이 마을에서 떨어진 곳에서 무더기로 나오기도 했다. 삶의 공간과 죽음의 공간이 분리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송국리의 청동기 유적은 집 토기 도구 무덤 등에서 이처럼 전기와는 다른 양상을 보여 고고학자들 사이에선 ‘송국리 문화’라는 유행어가 나올 정도였다. 윤형원 부여박물관장은 “부여 송국리는 한반도 청동기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다. 초중고 교과서에 송국리 유적이 꼭 등장하는 이유”라며 “방학을 맞은 학생들이 꼭 와서 봤으면 한다”고 말했다.
박물관에서 차로 30분 정도 가면 송국리 유적지가 있다. 원형 집터를 복원한 모형과 함께 완만한 구릉 위에 존재한 집터 흔적을 볼 수 있다. 청동기인이 왜 송국리에 터전을 잡았는지 마을 앞으로 펼쳐진 너른 들이 말해준다. 부여박물관 특별전은 내년 2월 18일까지다.
부여=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한반도 청동기 유물, 찬란했던 문화 웅변한다
입력 2017-12-04 0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