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미국이 만들고 한국 노동자가 떠안은 위기

입력 2017-12-01 05:01
1997년 12월 3일 서울 정부종합청사에서 당시 임창열 경제부총리(가운데)와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왼쪽), 미셸 캉드쉬 국제통화기금(IMF) 총재(오른쪽)가 IMF 구제금융 협상 타결을 발표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한국 경제를 크게 뒤흔든 ‘IMF 시대’의 시작이었다. 국민일보DB
역사에서 가정이란 무의미하다지만 국란(國亂)으로 불릴 만큼 혹독했던 그 난리를 겪은 지 20년이 지났으니 이젠 이런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1997년으로 돌아가 외환위기를 다시 마주한다면 한국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우린 무엇을 잘못했던 것인가.

이제민(67) 연세대 명예교수가 펴낸 ‘외환위기와 그 후의 한국 경제’는 저런 물음에 답하는 신간이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의 성격을 규정하면서, 신산했던 당시 상황을 복기했다. 환란 이후 한국 경제의 변화상까지 세세하게 담았다. 대단한 스케일의 세밀화다. 정부 차원에서 내놓은 외환위기 백서(白書)가 없는 상황이니 이 사태의 기승전결을 두루 확인하고 싶은 독자라면 반가울 만한 책이다. 학자들에게도 중요한 참고자료가 될 듯하다.

표지가 밋밋하고 제목은 따분하고 가격은 비싸니 서점에서 저 책을 마주한 독자들은 얼마간 저어한 기분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미리 말하자면 아주 어렵진 않은 책이다. 지금 한국 경제의 수많은 문제가 각각 어떤 인과관계를 맺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방대한 내용이 담겼지만 핵심은 두 가지다. 외환위기의 원인과 결과를 각각 분석한 게 이 책의 뼈대다. 후진적인 국내 경제구조 탓에 외환위기가 불가피했다는 식의 주장은 헛소리라는 게 저자의 일갈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였던 것일까. 이 교수는 고난도 십자말풀이를 하듯 얽히고설킨 과거 한국 경제의 문제들을 풀어내는데,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한국은 93년 은행들의 단기외채 도입을 허용했다. 자본시장의 ‘뒷문’을 열어준 것이다. 단기외채 유입→환율 하락→경상수지 적자로 이어지면서 정부의 지갑은 얄팍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 은행이 자국의 금융위기 탓에 대출금 상환을 요구하면서 문제가 시작됐다.

이 교수는 이렇게 썼다. “한국이 잘못한 것은 단기자본시장을 열면서 그런 외부적 요인에 대처할 만큼 외환보유액을 쌓지 못했다는 것이다.” 즉, 당장 빚을 갚을 수 없는 유동성 문제가 위기로 치닫는 도화선이 됐다는 의미다. 하지만 외환보유액이 적다고 항상 외환위기가 일어나진 않는다. 일본이 도와주면 괜찮았을 거다. 일본은 그럴 능력이 충분했다.

문제는 미국이었다. 미국은 지구촌에서 가장 역동적인 시장인 동아시아에서 자국이 배제되는 걸 두려워했다. 지역 단위의 국제경제기구 출현을 경계했다. 미국은 한국을 도우려는 일본을 저지했다. 자신들이 조종간을 잡은 IMF로 한국을 끌어들였다.

“미국은 그냥 두면 동아시아 내에서 해결될 유동성 부족 사태를 IMF로 가게 해서 사실상 외환위기를 ‘일으킨’ 뒤, 자신의 요구사항을 철저히 관철시키고 해결해 준 셈이다. 병 주고 약 주면서 약값을 많이 받아낸 꼴이다. …칼자루를 쥔 헤게모니 국가 미국이 기회를 노리다가 실수를 이용하겠다고 나오면 견딜 수 있는 나라가 몇이나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뼈아프게 다가오는 건 이 시기를 전후해 이어진 한국 정부의 헛발질이다. 미국과 IMF의 요구는 과한 측면이 많았다. 하지만 한국은 부당한 요구에 크게 저항하지 않았다.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이번 기회에 재벌을 개혁하자고, 경제구조도 바꾸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자, 이제 두 번째 논의로 넘어가자. 외환위기는 한국 경제에 무엇을 남겼을까. 일단 경제 성장률이 크게 떨어졌다. 98년부터 지난해까지 19년간 한국이 기록한 평균 성장률은 4.0%다. 외환위기 이전인 78∼96년 보여준 평균 성장률(8.8%)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소득 분배 수준도 크게 나빠졌다. 일자리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이 교수는 “위기는 ‘미국의 금융’이 일으키고 부담은 ‘한국의 노동’이 져야 했다”고 적었다.

물론 외환위기를 겪지 않았더라도 우리는 상당한 성장통을 치러야했을 것이다. 97년 국내에는 이미 심각한 금융위기가 벌어졌으니까. 무엇보다 재벌의 도산이 잇따랐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위기를 겪지 않았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더 한국 경제의 상황이 나았을 거라는 게 이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외환위기가 없었다면 대규모 재벌 도산 사태를 해결한 후 다시 간헐적 재벌 도산을 겪으면서 고도성장을 하는 체제로 돌아갔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끄트머리엔 학계를 질타한 내용이 등장한다. 길지 않은 내용이지만 고개를 끄떡이게 만드는 대목이다. 국내 경제학자들이 계량적 연구에만 몰두하고 있으니, 역사적 감각이 얕으니 지금까지도 이 사태를 종합적으로 다룬 연구가 별로 없다는 지적이다. 이 교수는 “필자가 30여년간 연구한 내용을 담았다”고 적었다. 책을 읽고 나면 저 말의 의미를 실감할 수 있다. 노작(勞作)이니 역작(力作)이니 하는 표현은 이런 책을 두고 하는 말이어야 한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