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기찬수] 저녁과 주말이 있는 삶을

입력 2017-11-27 17:31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우리나라 근로행태를 “근로시간은 회원국 가운데 가장 길고, 생산성은 선진국의 절반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지난 5월 한국노동연구원이 발표한 ‘한국의 유연근무제 도입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OECD 30개 회원국 가운데 일 가정 양립 지수 28위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간 정부는 시차출퇴근제, 적극적인 연가 권장 등 일하는 방식을 혁신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지만, 일과 가정이 양립하기 위한 여러 시도가 문화로 정착되기까지는 갈 길이 아직 먼 것 같다.

필자가 병무청장으로 부임하기 전 민간기업에 대표로 근무할 때 일이다. 대위로 전역 후 입사해 능력과 성실성을 인정받던 전도유망한 직원이 ‘돈도 좋지만 저녁이 있는 삶을 살고 싶다’며 갑자기 사직서를 내밀었다. 당시 그 직원의 선택이 당황스럽고 이해하기 힘들었던 기억이 선하다.

얼마 전, 젊은 부부 가정의 아침 일상을 그린 모 기업의 광고에서도 비슷한 경우를 보았다. 엄마 팔에 안긴 어린 딸아이가 출근하는 아빠에게 심드렁하게 “아빠, 또 놀러오세요”라고 말하자 분주하게 현관을 나가던 아빠는 멈칫하며 미안한 듯한 미소를 짓는다. 아빠는 다른 날보다 열심히 일한 뒤 빨리 퇴근해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스토리다. 개운치 않지만, 우리의 일상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변하고 있다. 글로벌 기업들이 직원 스스로 자유롭게 출퇴근 시간을 결정하도록 하는 등 유연한 근무행태를 통해 조직을 변화시키고 있다.

병무청도 일과 가정이 양립할 수 있는 근무여건 조성을 통해 행정 효율성을 제고하고 유연하고 창의적인 공직문화를 확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우선 직원들이 개개인의 여건에 맞춰 업무효율을 최대한 높일 수 있도록 근무시간의 자율적 설계를 독려하고 있다. 일례로, 소속기관의 경우는 민원업무를 담당하지 않는 부서를 중심으로 부서단위 유연근무를 실시하고 있으며, 특히 사회복무요원 교육을 담당하는 충북 보은의 사회복무연수센터는 교육생들이 교육을 마치고 귀가하는 금요일에는 기관단위로 유연근무를 실시하고 있다.

또한 자녀를 둔 직원들이 연령에 따라 활용할 수 있도록 ‘모성보호시간’ ‘육아시간’ ‘자녀돌봄휴가’ 등을 적극 권장하고 있으며,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을 ‘가족 사랑의 날’로 정해 정시에 퇴근토록 권유하고 있다. 부서장 눈치를 보지 않고 자유롭게 연가를 사용할 수 있도록 사유를 기재하지 않고 연가를 신청토록 하고 있으며, 연가저축제를 활용한 장기 휴가를 보장하고 있다.

아울러 영·유아 자녀를 둔 직원들의 육아휴직을 보장한 결과, 최근 3년간(2014∼2016년) 병무청의 육아휴직 사용률은 26.7%로 정부부처 평균 사용률 13%를 크게 웃돌고 있다. 그리고 남성 육아휴직 사용률 역시 정부부처 평균이 3%(2.9%)에도 미치지 못하는데 비해 병무청은 4.5%로 다른 부처에 비해 크게 활성화되어 있다.

미래학자들은 4차 산업혁명은 정보통신기술(ICT)을 기반으로 전 세계 사람·사물을 하나로 연결할 수 있으며 노트북이나 태블릿PC, 스마트폰 등으로 시·공간적인 제약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역으로 말하면, 하루 24시간 일에서 벗어나기 힘든 구조로 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노동으로 인한 체력적인 손실뿐만 아니라 저출산·고령화로 인한 노동인구의 절대적인 감소를 막기 위해 다가올 미래에는 일·가정 양립이 반드시 보장되어야 할 것이다.

현 정부는 일·가정 양립보다 더 확대된 개념인 ‘일과 생활의 균형’을 국정과제로 추진하고 있다. 병무청도 보다 실효성 있는 근무혁신으로 자신과 가정에 충실하고 스마트하게 일할 수 있는 조직으로의 변모를 통해 국민들에게 고품격 서비스가 제공될 수 있도록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기찬수 병무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