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봉투 사건으로 기소된 이영렬 전 서울중앙지검장은 지난 14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결심공판에서 벌금 500만원이 구형되자 “정말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국정농단 수사가 일단락되고 그동안 고생한 직원들에게 회식과 격려를 해줬다. 기관장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고 역대 서울중앙지검장들이 늘 해 왔던 일”이라고 했다. 관행대로 회식하고 격려금 줬는데, 갑자기 죄인 된 처지가 너무 억울하다는 항변이었다. 자유한국당 소속 권성동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은 지난 23일 느닷없이 양심고백을 했다. 권 위원장은 “나도 법무부 근무 시절 특수활동비를 받았다. 법의 날, 세계인권선언기념일 행사 잘 치렀다고 장관이 빳빳한 현찰을 금고에서 꺼내 500만원씩 줬다”고 고백했다. 권 위원장은 1996년부터 1998년 2월까지 법무부 인권과 검사로 일했다. 김영삼정부와 김대중정부가 걸쳐 있던 시기다. 권 위원장이 근무하던 시절 법무부 장관은 모두 4명이었다. 20년 전 얘기인 데다 김영란법도 없던 시절이다. 권 위원장의 고백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이영렬의 탄식과 권성동의 고백은 보수의 당혹감을 보여준다. 과거로부터 이어졌던 관행이었는데, 갑자기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에 대한 억울함이다.
문재인정부에 앞서 9년을 집권했던 보수 정권 인사들의 탄식은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그렇다고 과거에 다들 그랬으니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넘어가자는 논리는 설득력이 없다. 무엇보다 이런 종류의 항변이나 탄식은 국민 공감을 얻기 어렵다. 관행이라고 목청 높여 호소해봐야 ‘당신들만의 관행’이라는 싸늘한 시선이 돌아올 뿐이다. 결국 국민 세금으로 회식하고 격려금 준 것 아니냐는 비판에는 대응할 논리가 없다. 국민 눈에는 관행이라는 이름을 빙자한 세금 유용 혹은 세금 횡령에 다름 아니다.
현재 국정원 특활비 수사가 한창이다. 대상이 된 옛 여권 인사들은 억울함을 호소한다. 그런데 수사의 큰 얼개는 대북 관련 공작이나 해외 관련 공작비로 사용돼야 할 돈을 관행에 따라 자기들끼리 나눠 썼다는 것이다. 모르면 넘어갔겠으나, 관련 사실이 드러났으니 법의 잣대를 들이대야 하고 죄가 있다면 처벌받아야 하는 구조다.
다만 이들만 처벌되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일까라는 의문이 남게 된다. “그렇다”라고 말한다면 자기최면에 빠졌을 가능성이 높다.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선택적 지각 오류다. 더 복잡하고 생각해볼 문제가 많다. 엄격한 잣대와 더 엄격한 잣대들을 들이대면 보수정부뿐만 아니라 진보정부도 자유롭지 않다. 말하자면 고위 공직 후보자의 위장전입이나 아파트 다운계약서 같은 성격의 문제들이다. 야당일 때는 엄중히 비판하지만 막상 자신의 문제가 되면 난처해지고 양해를 구할 수밖에 없게 된다.
노무현정부시절 청와대 행정관들은 월 한두 차례 노란 현금봉투를 받았다. 직급에 따라 액수는 달랐다. 70만∼100만원이었다고 한다. 영수증을 붙여 소명하지 않아도 되는 돈이었다. 택시도 탔고, 회식비용으로도 사용됐다. 그런 돈들을 모조리 추적하자면 끝이 없다. 그 이전 김대중·김영삼정부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한이 없을 것이다. 정부 부처와 공공기관 대부분의 수장들은 명확히 설명하기 어려운 각종 활동비용을 부처 예산 여러 곳에 다양한 항목으로 배정해 놓는다. 총무과 예산에 배정하기도 하고, 기획조정실 예산에 숨겨두기도 한다. 장관이나 기관장이 고생한 직원들 회식시켜주고, 금일봉 전달하는 돈이 그런 예산에서 나온다. 정부 예산 중 특활비는 국정원 5000억원을 포함해 연 1조원 정도다. 그런데 관행 등의 이유로 원래 목적과 다르게 사용되는 예산 규모는 파악도 쉽지 않고, 제대로 알려진 적도 별로 없다. 그런 관행들을 모두 수사할 수도 없고, 그런 관행들이 적폐인지에 대한 사회적 논의도 필요하다. 드러난 범죄를 수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드러나지 않은 관행을 개혁하는 일이 더 중요해졌다.
남도영 정치부장 dynam@kmib.co.kr
[돋을새김-남도영] 보수의 탄식, 진보의 자기최면
입력 2017-11-27 1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