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중순 제주에서 일반 시민, 각계 전문가, NGO 활동가 등이 참여한 ‘한·일 시민 100인 미래 대화’가 열렸다. 한국국제교류재단, 서울대 일본연구소, 도쿄대 한국학연구센터가 공동 주최하고 필자를 비롯한 고려대, 국민대, 한림대의 일본연구소, 와세다대, 리쓰메이칸대, 규슈대의 한국연구소가 협력기관으로 참여했다. 인적·문화 교류, 과학기술협력, 인구문제·사회복지 협력 등 다양한 분야에 걸친 시민사회 간 대화는 이번이 최초일 것이다.
모임을 마치면서 10대 행동계획을 담은 ‘한·일 시민 100인 2017 제주 선언’을 발표했다. 2018년 한·일 시민 파트너십 선언 채택. 인터넷 공간에서 한·일 문화 플랫폼 구축, 조선통신사 계승을 위한 한·일 역사문화 벨트 창출, 원자력 안전 및 환경 정보의 공개·교환·공유, 의료·보건 분야 기술 공유 및 감염병 공동 대응, 기후재해 완화 및 저탄소화 관련 한·중·일 협력, 인구문제·청년빈곤 분야 교류, 어린이·청소년 교류 전면적 확대, 지방자치단체·NGO·교육기관 등을 통한 제도적 인프라 구축, 평창 및 도쿄 올림픽 기간의 시민 간 평화축제 활용 등이다. 독자들 눈엔 지나치게 방대하고 이상적인 목표로 보일 듯하다. 과거사 문제 언급이 없어 마뜩찮을지도 모르겠다. 재정적 기반이 취약한 상태에서 과연 교류·협력이 지속가능할지도 의문일 것이다. 그러나 기존의 통념이나 선입견을 버린다면 새로운 가능성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우리는 대개 시민사회 간 교류·협력이 한·일관계의 안전판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일본 정치의 우경화나 과거사와 관련된 정치인들의 망언이 한·일관계 악화의 주범이며 일본의 시민사회가 당연히 그러한 부분을 견제해야 한다고 기대한다. 하지만 그런 기대는 자주 실망으로 바뀐다. 일본 시민사회는 2015년 여름 반대 운동을 전개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베 정권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 결정을 저지하지 못했다. 아베 정권이 추진하는 개헌에 대해서도 시민사회가 별다른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으로 보고 별로 기대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렇게 기대하고 실망하는 모습은 순전히 우리 자신이 북 치고 장구 치는 꼴이다. 우리 시민사회는 이른바 애드보커시가 강하다. 중앙정치를 둘러싼 노선이나 신념에 대한 공개적 운동이 강하다는 말이다. 4·19, 1980년대 민주화 운동, 촛불혁명 등의 경험을 해서다. 일본에선 애드보커시가 상대적으로 약하다. 패전 직후 노동운동, 50∼60년대 안보 투쟁, 최근의 집단적 자위권 반대 등 대규모 정치 운동을 통한 국가권력 견제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렇다고 일본 시민사회와의 교류·협력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일본에는 서구와 유사하게 수많은 지역 밀착형 소규모 자율적 결사체들이 존재하며, 이들이 국가와 사적 영역의 개인을 매개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특히 복지·의료, 환경 보전, 교육·문화, 국제협력 등 지방자치단체와 연계한 NGO 활동은 배울 점이 많다. 양국의 시민사회는 서로의 강점을 한데 어우러지게 하면서 상호보완적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공간이 존재하는 것이다.
인권·과거사 문제를 중심으로 형성된 시민사회 간 협력·연대를 다른 분야로 확대시켜 나가야 할 시점이다. 제주 미래 대화에서 인권·과거사 문제를 먼저 제기한 것은 일본 측이었다. 조선인 강제노동 피해자 보상 입법이나 국제사회에서 일본군위안부 관련 초국적 시민연대를 추진해온 사람들이다. 한 사람은 얼마 전 서울국립현충원 내의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을 방문하고 왔다고 했다. 조선인노동자 유해 발굴, 유골 봉환 사업을 하고 있는데 감식단의 장비나 노하우가 뛰어나 이를 배우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이들은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면서 현장에서 매듭을 하나하나 풀어내고 있었다.
동아시아 국가 간 관계는 정권 간 관계에 지나치게 휘둘리곤 한다. 주위를 돌아보면 건강한 시민사회를 가진 나라가 몇 안 된다. 한·일 시민사회 간 협력은 선택이 아닌 당위가 아닐까.
서승원(고려대 교수·글로벌일본연구원장)
[한반도포커스-서승원] 한·일 시민 100인의 제주선언
입력 2017-11-26 1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