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김혜림] ‘마녀의 법정’을 보면서

입력 2017-11-22 17:48 수정 2017-11-22 17:59

‘기자답지 않은 취미생활’. 머리 큰 두 아들이 퇴근 후와 주말의 여유 시간에 드라마를 보는 엄마에게 하는 ‘지적질’이다. “취미생활은 자기가 좋은 것을 하는 것이니 무슨 상관이냐”고 볼멘소리를 하지만 내심 뜨끔할 때가 많다. 그런데 요즘에는 “이거 다 공부야!” 큰소리치며 본다. 바로 ‘마녀의 법정’이다. ‘여성아동범죄전담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드라마는 큰 줄기는 물론 에피소드들도 성폭력 범죄에 관련된 것들이다. 이 드라마를 보면서 한국판 ‘미투(Metoo·나도 당했다)’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할리우드 거물 제작자 하비 와인스틴의 성추문으로 촉발된 성폭력 고발 미투 캠페인은 지구촌 전역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미국의 투자전문매체 ‘배런스’는 최근 직장 내 성추문이 기업들의 새로운 리스크로 부상했다고 보도했다. 실제로 미국 차량공유업체 우버(Uber) CEO 트래비스 칼라닉, 벤처캐피털 ‘바이너리캐피털’의 공동 설립자로 실리콘밸리에서 투자자로 명망 높았던 저스틴 칼드벡 등이 우월적 직위를 악용한 성추문으로 사임했다. 불과 5개월 전 일이다. 영화제작사 와인스틴컴퍼니는 와인스틴의 성추문으로 자금 조달이 어려운 상황이다. 폭스뉴스는 인기 방송 진행자인 빌 오라일리가 동료 여성 앵커를 성폭행한 추문으로 광고가 급감했다.

강 건너 불이 아니다. ‘그럴 수도 있는 일’로 치부됐던 직장내 성추문에 대해 국내 여론의 질책도 매서워졌다.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 최호식 호식이두마리치킨 회장이 직장 내 성추문으로 자리를 내놨다. 국내 1위 가구·인테리어 업체 한샘은 직장 내 성폭력 논란으로 홈쇼핑에서 퇴출돼 매출 급감이 예상되고, ‘좋은 회사인 줄 알았는데 실망했다’는 소비자들의 질책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한샘 사건은 기업들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성폭력 관련 당사자들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상반된 주장을 올리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해 시시비비를 가리는 중이다. SNS에는 피해를 주장하는 여성을 ‘꽃뱀’이라고 할 만큼 남성을 옹호하는 글도 적지 않다. 하지만 이 사건에 대한 회사의 대응에 대해선 실망 일색이다. 결국 불매 운동으로까지 이어졌다. 직장 내에서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을 때 회사는 개인이 아닌 직장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해결해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기업들은 가해자와 피해자 개인의 문제로 접근한다. 나아가 피해자에게 문제를 덮고 갈 것을 해결책으로 내놓기 일쑤다.

가구업체뿐만 아니라 금융계, 병원, 공기업 등에서 직장 내 성폭력 시비가 일자 대통령까지 나섰다. 엊그제 문재인 대통령은 청와대 국무회의에서 성희롱과 성폭력 예방은 물론 피해자가 피해를 보고도 문제제기를 하지 못하는 분위기나 문화부터 시급히 바로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통령 말씀도 있었으니 직장 내 성폭력 문화 개선에 대한 기대가 높아진다. 다만 국무회의 관련 보도를 보면 직장 내 성폭력을 여성들의 문제로 한정하는 분위기여서 아쉽다.

직장 내 성폭력의 피해자가 여성이 월등히 많은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직장 내 성폭력이 여성문제는 아니다. ‘마녀의 법정’의 2화 ‘여교수 강간 미수 사건’에서 보듯이 여성이 직장 내 성폭력 가해자인 경우도 적지 않다. 직장 내 성폭력은 힘을 가진 자가 힘이 없는 자를 성적(性的)으로 괴롭히는 것이다. 남성 대 여성이 아니라 강자 대 약자의 문제다. 따라서 직장 내 성폭력 근절은 남녀 모두를 위한 일이다. ‘꽃뱀론’으로 직장 내 성폭력 문제를 눙치고 덮으려는 일부 남성의 어깃장은 부메랑이 될 수도 있다. 직장 내 성희롱 사건에 대한 사업주의 사실 확인 및 피해 근로자 보호 조치를 의무화하는 ‘남녀 고용 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지난 9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직장 성폭력 발생 때 사업주의 책임이 강화된다고 하니 사업주와 노동자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

김혜림 논설위원 겸 산업부 선임기자 ms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