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에 앞서 1950년대 중반
매스미디어·상업디자인 등
작품에 도입하는 새로운 시도
워홀·리히텐슈타인에 영감 줘
이 정도면 ‘숭배’다. 여느 가정에나 있는 토스터. 그 일상적 가전제품이 거대한 크기의 사진으로 캔버스에 프린트됐다. 미끈한 메탈이 있는 부분은 캔버스에도 메탈을 붙였다. 로고까지 찍힌 평범한 가전제품. 그런데 ‘거인’처럼 크기를 확대시켰고, 은빛 차가운 금속성이 주는 권위 덕분에 토스터기는 아우라를 풍긴다.
‘팝 아트의 원조’ 영국의 리처드 해밀턴(1922∼2011)이 왔다. 앤디 워홀, 로이 리히텐슈타인 등 미국 팝 아트 작가에 영감을 줬지만 정작 그들의 그늘에 가렸던 작가다. 3주기이던 2014년 2월, 영국 런던 테이트모던에서는 해밀턴 특별전이 크게 열렸다. 예술인생 60년을 집대성한 대규모 회고전은 ‘원조 팝아티스트’의 복권을 노리는 영국의 야심찬 시도였다. 그의 전시가 아시아 최초로 한국에서 열리고 있다. 한·영 상호교류의 해를 맞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마련한 ‘연속적 강박’전(내년 1월 21일까지)이다.
해밀턴은 1960년대 활동했던 미국 작가들에 앞서 50년대 중반부터 작품 속에 신문의 만화 사진 TV뉴스 등 이미지, 상업디자인, 영화 장면을 적극 끌어들였다. 2차 대전 이후 소비문화가 꽃필 즈음이다. 주부가 나오는 광고를 활용하며 작품 속에 진공청소기 냉장고 같은 현대식 가전제품과 ‘에스콰이어’지에 수록된 여배우의 ‘핀업’ 사진을 등장시켰다.
홀대받았던 대중문화를 순수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온 것이다. 이를 통해 이미지를 전복하고 사회를 풍자한다. 이 전시를 공동 기획한 영국 출신 큐레이터 제임스 링우드(58·아트엔젤 대표)는 “토스터는 20세기 소비문화의 아이콘 같은 존재다. 해밀턴은 토스터 연작을 종교화의 경지로 만들었다”면서 “소비가 종교가 된 현대사회의 물신숭배를 잘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신문 방송의 사진이나 영상도 작품 속에 차용한다. ‘스윙징 런던(Swingeing London)’ 연작이 대표적이다. 67년 팝가수인 믹 재거와 화랑 소유주인 로버트 프레이저가 마약 불법 소지죄로 법원에 호송되는 사건이 대서특필됐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자 수갑을 찬 손을 끌어올려 얼굴을 가리는 순간의 사진을 토대로 제작된 연작은 스타의 등장과 대중의 관음적 시선을 웅변하며 그에게 명성을 안겨줬다.
감방에서 시위하던 아일랜드 공화국군 수감자를 묘사한 ‘시민’ 연작은 죄수를 핍박받는 예수 같은 얼굴로 제시했다. 이는 당시 방송에서 쓴 이미지를 그대로 가져와 회화처럼 보여준 것으로 미디어의 조작에 대한 고발이다.
키치적인 꽃그림도 나왔다. 아름다운 꽃 옆에 화장실 휴지가 있고 심지어 똥도 있다. 정물화에 해골을 그려 넣은 ‘바니타스’(죽음과 인생무상) 주제의 17세기 네덜란드 정물화를 연상시키는 시도다.
이번 전시는 회고전처럼 생애를 파노라마로 보여주기보단 작가가 천착한 소재를 클로즈업한다. 토스터, 시민, 꽃 연작처럼 그는 항상 같은 소재를 오랜 세월에 걸쳐 회화 드로잉 동판화 실크스크린 등으로 다양하게 변주한다. 전시 제목이 ‘연속적 강박’인 건 그래서다.
열 네 살에 학교를 그만둔 작가는 왕립예술학교에서 정식 미술훈련을 받기 전에 상업미술 분야에서 일한 바 있다. 그때 익힌 감각을 가져와 서양미술사의 역사화 종교화 장르화를 현대 버전으로 재탄생시킨 작가라고 정의할 수 있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英 ‘팝아트 원조’ 해밀턴의 세계로… 아시아 첫 전시회
입력 2017-11-21 0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