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코메티가 온다] 자코메티의 조각에서 마주하는 존재의 흔적과 상처

입력 2017-11-20 20:27

지금은 좀 수그러들긴 했지만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웰빙을 외치는 소리를 곳곳에서 들을 수 있었다. 웰빙의 열풍이 한풀 꺾이더니 갑자기 힐링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하긴 웰빙을 외쳤건만 현실은 상처투성이니 힐링이 필요하기는 하다. 그런데 이런 힐링과 웰빙의 관계를 생각하면 ‘병 주고 약 준다’는 속담이 떠오른다. 물론 웰빙과 힐링 그 자체는 우리 모두가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삶의 포장에 불과한 것이라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진정한 웰빙과 힐링을 위해 우리는 지금 여기의 삶과 현실에 대한 존재론적인 성찰을 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섬세하게 흔들리는 존재의 결들 사이에 남은 흔적 그리고 상처를 솔직하게 볼 수 있을 터이다. 현대예술의 거장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조형언어는 이 존재의 흔적과 상처를 오늘의 우리에게 커다란 울림으로 들려준다.

“자코메티의 예술은 모든 존재와 사물의 비밀스러운 상처를 찾아내어 그 상처가 그들을 비추어 두게끔 하려는 것 같다”고 프랑스 극작가 장 주네는 말한다. 자코메티는 1935년 이후 초현실주의 작업에서 벗어나 점점 더 작은 인물상을 만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1945년 파리로 돌아온 후로는 가늘고 긴 조각을 제작하는 데 집중한다. 이 시기의 인체조각은 매우 놀랍다. 전통적인 조각에서 강조된 공간, 매스(덩어리), 구조 등의 개념으로는 파악하기 힘든 조형적 전복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그리스 고전기 조각의 절정을 보여주는 폴리클레이토스의 ‘도리포로스’나 르네상스의 거장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 그리고 자코메티의 스승인 부르델의 ‘활을 쏘는 헤라클레스’를 떠올려보면 자코메티의 조각은 너무나 왜소하고 가볍다. 그러나 툭 건드리면 넘어지고 부서질 것 같은 그의 조각은 오히려 삶을 버티며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지 않은가. 자코메티의 조각은 공간을 점유하지 않으면서도 공간을 압도하고, 매스의 물리성을 극도로 배제하면서도 인간의 실존적 상황에 상응하는 매스를 재현한다. 그러기에 그의 조각에서 삶의 흔적과 상처가 저절로 감지된다.

흔히 자코메티의 조각이 인간의 실존적 고독을 표현한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자코메티는 1962년 안토니오 델 구에르치오와의 인터뷰에서 흥미롭게도 “나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작업을 하면서 한 번도 고독이라는 주제를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고 말한다. 의외의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실상 자코메티는 특정한 생각이나 이념 혹은 형이상학적 사유를 조각으로 표현하려고 시도하는 조각가가 아니다. 그는 철저하게 시선과 흔적의 조각가다. 자코메티의 작업실을 보라. 그곳에서 수없이 반복된 인체조각의 흙붙임 하나하나는 그의 시선이 남긴 흔적이다. 그 흔적에서 촉발된 존재의 상처는 실존적 딜레마를 안고 살아가야만 하는 우리에게 기억되고 회상된다.

흔적의 미학이 여실히 내재된 자코메티의 조각은 아름다움에 대한 우리의 도식적 탐구를 부질없게 만든다. 그의 작업은 아름다움을 흙, 석고, 브론즈 등에 덧씌우거나 결합하는 것에 목적을 두지 않는다. 또한 형식과 내용의 통일이나 조화를 통해 이루어지는 아름다움을 구현하는 것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의 인체조각의 흙붙임은 삶과 예술에서 부단히 추구되어야 할 과정의 미학에 대한 조형적 지표다. 자코메티의 조각은 끝내 재현될 수 없기에 좌절될 수밖에 없는 바로 그곳에서 흔적으로 남아 부단히 실패하는 아름다움, 그러니까 존재의 상처를 껴안은 우리 인간의 부조리한 아름다움을 표상한다.

임성훈 (미학·성신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