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 땐 속수무책… ‘한날한시’ 수능 대안 없나

입력 2017-11-20 05:00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앞두고 마지막 휴일인 19일 서울 양천구 목동종로학원에서 수험생들이 공부를 하고 있다. 김지훈 기자

위험분산 대책까지… 더 복잡해진 대입제도 개편 방정식

현행 일제고사 방식 고수 땐
기존 대응 매뉴얼 정비론 한계

재시험 가능토록 일정 조정 고려
자격고사 전환 힘 실릴 가능성

수능 절대평가 전환 여부 등
교육부 내년 8월 종합대책 주목

경북 포항을 덮친 것과 맞먹는 지진이 대학수학능력시험날 닥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진앙 부근 고사장은 운동장으로 대피한 수험생과 감독관으로 아수라장이 된다. 진앙에서 다소 떨어진 고사장도 패닉에 빠진다. 책상 아래 숨은 수험생들은 여진 공포에 떨고 감독관은 딜레마에 빠진다. 운동장으로 대피하면 시험은 종료된다. 그러나 주저하면 대피의 골든타임을 놓칠 수 있다.

응시자의 1%가량인 5000여명이 지진 때문에 시험을 못 치렀을 경우 1% 때문에 99%가 또 시험을 봐야 하는지 논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시험을 잘본 수험생과 그 학부모들이 취소 반대 목소리를 높인다. 재시험을 요구하는 쪽도 만만치 않다. 정부는 재난지역 특별전형 등을 검토해 보지만 결국 재시험 결정을 내린다. 출제·검토위원들은 다시 합숙에 들어가고 3주에서 1개월가량 수능 시험은 미뤄진다. 대입 일정이 꼬이고 대학 학사 일정도 엉망이 된다. 일부 수험생은 진로에 큰 타격을 입는다.

정부가 지난 15일 포항 지진 직후 내린 수능 1주일 연기 결정은 “불가피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다음에도 용인될까. 교육부는 지난해 9월 12일 발생한 경주 지진 때 ‘수능 당일 지진 대책’을 만들었다. 매뉴얼을 제작하고 훈련도 몇 차례 했지만 실제 작동할지 교육부도 장담하지 못했다. “설마 수능날 지진이 나겠어”라고 낙관하며 지난 1년여 기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셈이다.

경고는 이미 두 차례나 나왔다. 제대로 대비하지 못하면 이제는 천재(天災)보다 인재(人災) 범주에 들어가게 된다. 교육부가 ‘위험분산 대책’을 내놔야 하는 이유다.

사실 한날한시에 모든 수험생이 같은 문제를 푸는 일제고사 방식을 고수하면 선택지가 많지 않다. 매뉴얼 정비는 한계가 뚜렷하다. 지진 때 수험생이 느끼는 충격의 정도는 제각각이다. “이 정도는 괜찮으니 시험 보라”는 기준 설정 자체가 불가능에 가깝다. 이어지는 여진의 규모는 예측 불가능한데 대다수 고사장은 내진 설계가 적용되지 않았다. 수능 시험 도중이라도 일단 진동이 느껴지면 대피하는 게 현명하다.

한 차례 정도는 재시험이 가능하도록 수능 시험을 앞당기는 방식도 있다. 하지만 이는 고교 교육과정을 손봐야 하는 데다 근본적 해결책도 아니다. 이 때문에 문제은행식 자격고사 전환에 힘이 실릴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문제은행 방식은 난이도 조절과 재시험이 용이하다. 지진이 잦은 일본이 채택하는 방식이다. 다만 국내 대입 열기를 고려하면 수험생이 문제들을 통째로 외우는 부작용도 있을 수 있다. 대학에서 공부할 역량을 측정하겠다는 시험이 암기 과목으로 변질될 소지가 있다.

정시 모집의 축소·폐지, 학생부종합전형(학종)의 공정성 논란 등과도 엮여 있다. 수능이 자격고사가 되면 정시는 폐지 수순을 밟을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대입 재도전의 기회가 봉쇄되는 등 부작용이 만만치 않다. 평가자의 주관이 개입되는 정성평가 위주의 학종 비중이 커지면 ‘관리 받는 학생’만 좋은 대학에 진학한다는 공정성 논란이 증폭될 수 있다.

교육부는 내년 8월 수능 절대평가 전환과 학종 공정성 제고 방안, 고교 내신산출 방식 등을 담은 종합대책을 내놓을 예정이다. 김상곤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지난 8월 수능 절대평가 전환 논의 과정에서 자격고사에 가까운 ‘공통과목 위주 전 과목 절대평가’안을 선호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수능 변별력 상실을 우려한 여당과 정부 내부 반발에 밀려 우왕좌왕하다 결정을 1년 미뤘다. 이번 수능 연기 사태로 대입제도 개편의 방정식이 한층 복잡해졌다.

세종=이도경 기자 yido@kmib.co.kr, 사진=김지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