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국조원’.
2014년 3월 5일 국가정보원 협력자 김원하씨가 자살을 기도하며 투숙했던 모텔 벽면에 피로 쓴 글이다. 그는 두 아들에게 남긴 유서에 ‘대한민국 국정원에서 받아야 할 금액이 있다. 2개월 봉급 300×2=600만원, 가짜 서류 제작비 1000만원…’이라고 적었다. 화교 간첩수사 증거조작 사건으로 세 번의 검찰 조사를 받고 돌아간 날 밤의 일이다.
그때는 몰랐다. 국정원 돈을 받고 지시에 따르던 60대 중국국적 협력자가 죽을 작정을 한 순간 왜 국정원을 향해 국가조작원이란 치욕의 말을 남겼는지. 그것이 국정원 본원과 해외 블랙 요원, 중국 내 ‘관시(關係·인맥), 위조브로커 등이 총동원돼 벌인 거대한 음모의 끄트머리였음을.
한 달 뒤 발표된 수사 결과는 비루한 공작의 밑바닥을 드러냈다.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의 헌신’(당시 원훈)은 북·중 접경지대 어딘가에 버려졌다. 중국 당국이 발급해줬다던 유우성씨의 출입국 관련 기록은 위조됐거나, 현지 호텔 방안에서 날조된 것이었다. 대검찰청이 자료 출처 확인을 위해 중국으로 발송한 공문은 중간에서 빼돌려졌고, 국정원 직원은 인터넷팩스 번호까지 조작해 가짜 서류를 전달했다. 유씨의 1심 무죄 뒤 2013년 9월∼2014년 2월 진행된 국정원 대공수사국의 기획·연출 수준이 이랬다.
수사·공안 당국 일부 인사들은 아직도 유씨를 간첩이라 믿는다. 그러나 국정원이 재판 증거에 손을 댄 사실이 들통 났을 때 이미 게임은 끝나 있었다.
2013년 국정원 대공수사 지휘라인 꼭대기는 남재준 국정원장과 서천호 2차장이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 집권 첫해였다. 그해 4월 검찰은 댓글 사건 수사팀을 꾸려 국정원의 정치·대선 개입 의혹 수사를 시작했다.
그때는 몰랐다. 검찰의 사상 두 번째 국정원 압수수색이 실시됐을 때 국정원이 위장 사무실을 차려놓고 수사팀을 기만했을 줄은. 수사·재판을 받는 요원들에게 증거 삭제와 허위 진술을 교육하고 있었을 줄은. 이들의 공작은 간첩 관련 사건에서만 벌어지는 게 아니었다. 대가는 혹독했다. 수사·재판 방해에 가담했던 서 전 차장 등 6명이 구속되고, 20년 경력의 검사와 국정원 소속 40대 변호사가 숨졌다.
남 전 원장은 취임 일성으로 “나는 전사가 될 각오가 돼 있다”고 했다. 육군 대장 출신인 그에게 ‘국가안보의 첨병’이라는 국정원은 일생일대의 전장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싸움의 상대가 한참 잘못됐다. 국정원의 안테나는 북한을 향해야 하고, 혈세로 육성한 전사들은 세계의 정보전쟁터에서 맹렬히 싸워야 했다. 일반 국민이나 국내 정치·선거가 아니라. 그러니 국익을 위한 비밀활동에 쓰라는 특수활동비를 대통령에게 바친 남 전 원장이 검찰에 출석하며 “국정원 직원들은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마지막 보루이자 최후의 전사”란 말을 입에 올릴 자격은 애초 없었다.
그의 전임자인 원세훈 전 원장, 그의 뒤를 이은 이병기·이병호 전 원장도 결국 ‘불법 공작의 계승자’ 노릇을 하다 법의 심판을 받게 됐다. 현 정부 탓도, 검찰 탓도, 관행 탓도 아닌 것이다.
한국의 국가정보기관은 1961년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혁명과업을 위한 악역’을 자처하며 중앙정보부를 창설한 이래 줄곧 권력의 친위대 역할을 했다. 79년 10·26 사태 이후 들어선 제5공화국이 그 명칭을 국가안전기획부로 바꾸고, 북풍·총풍·세풍 사건이 터진 뒤인 98년 다시 국정원으로 바꿨어도, 그 속 음험한 공작의 DNA는 그대로 계승됐다. 적어도 국민은 그렇게 생각한다. ‘시크릿 파일 국정원’의 저자 김당은 이런 실상에 대해 “이상은 CIA(미 중앙정보국), 현실은 KGB(구 소련 국가보안위원회)”라고 촌평했다. 지금의 격랑은 ‘국조원’을 ‘국정원’으로 되돌리는 개토 과정이라 믿고 싶다. 이러고도 바뀌는 게 없다면. 그때는 완전히 문을 닫게 해야겠지. 국정원의 존재이유인 자유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지호일 사회부 차장 blue51@kmib.co.kr
[세상만사-지호일] 국·조·원
입력 2017-11-16 17:52 수정 2017-11-16 2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