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종교개혁의 날’로 기억되는 10월 31일이 또 누군가에게는 ‘핼러윈 데이’로 기억될 것이다. 11월 11일도 그렇다. 누군가는 ‘빼빼로 데이’로 기억할 것이고, 또 누군가는 ‘가래떡의 날’로 기억할 것이다. 어떤 날로 기억할지는 개인의 몫이겠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우리의 생활 세계가 이미 요란한 광고의 홍수 속에 잠긴 상황에서 개인의 주체적 선택이 과연 가능하겠는가 말이다. 소비자를 현혹하는 이런저런 ‘데이’들은 대체로 명분이 명확하지 않거니와 해당 업체의 기발한 상술로 탄생한 ‘상품’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설령 그런 줄 안다 해도 간단히 무시하고 넘어가기가 쉽지 않은 건 우리가 몸담고 사는 소비사회의 위력이 그만큼 크다는 방증이겠다.
이런 현상을 꼬집은 철학자가 있다. 한 개인에게서 주체의 탄생이란 거의 불가능한 과업이라는 걸 꿰뚫어본 그는 키에르케고르. 공교롭게도 11월 11일은 그가 세상을 떠난 날이다. 우리에게는 ‘실존주의 철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는 문학 비평가이기도 했다. 그의 주된 비평 대상은 ‘동화의 아버지’ 안데르센이었다. ‘분홍신’ ‘미운 오리새끼’ 같은 유명 동화들을 남긴 그 안데르센 말이다.
‘분홍신’이라면 나도 좀 불편한 느낌이 있다. 신앙을 빙자해 여자 어린이에게 ‘여자다움’을 강요하는 플롯이 차라리 유교에 가깝지, 기독교 본연의 가르침과는 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그런 플롯을 비틀어 ‘잔혹동화’로 발전시킨, 같은 제목의 호러영화가 나왔을까. 한데 ‘미운 오리새끼’는 별로 불편한 줄 몰랐다. 못나서 구박받던 미운 오리새끼가 마침내 백조가 된다는 줄거리에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단 말인가.
안데르센의 삶은 그랬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거나 ‘개천에서 용 난다’는 속담이 딱 어울리는 삶이었다. 하지만 키에르케고르의 눈에 기독교의 진리는 그보다 더 깊은 데 있었다. 미운 오리새끼가 백조가 된다는 설정은 ‘예수 믿으면 만사형통’이라는 말만큼이나 공허한 수사에 지나지 않았다. 나아가 그런 수사는 예수의 십자가와 맞지 않는다고 봤다. ‘예수를 잘 믿어서 복 받았다’는 말보다는 ‘예수를 잘 믿어서 고난당했다’는 말이 더 신앙적이지 않겠는가. 예수의 길은 가시밭길인데, 우리는 왜 꽃길만 걸으려 하는가.
그가 쓴 ‘기러기’는 작심하고 ‘미운 오리새끼’를 뒤집는다. 어느 날 하늘에서 기러기가 내려와 날개가 퇴화해 날지 못하는 거위들에게 하늘을 나는 법을 가르친다. 하지만 거위들은 그를 ‘몽상가’로 여길 뿐 도무지 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렇게 소외당하고 외면당하던 기러기는 끝내 의기소침해져서 자기도 거위처럼 날지 못하게 된다.
그가 이해하기로 ‘종교개혁’의 알짬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어떤 ‘브로커’도 없다는 것이다. 인간이 ‘신 앞에 선 단독자’가 되게 하는 게 참믿음이다. 그러나 당시 덴마크 교회는 신자를 다시금 노예의 자리에 두려고 했다. 목사와 평신도는 단지 역할의 구분일 뿐 지위 구분이 아님에도 목사가 평신도와 하나님 사이에 끼어들어 축복과 저주를 중개했다.
그러니까 ‘기러기’에 나오는 거위는 덴마크 교회의 그릇된 신학에 선동당한 신자들을 비꼰 표현이다. 그런가 하면 기러기는 키에르케고르 자신을 가리킨다. “깨어있으라”고 외치는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는커녕 이단으로 몰아세우는 교회 분위기가 무척 섭섭했던 모양이다.
마흔두 살로 생을 마감한 그의 장례식은 미루고 미루다 일주일이나 넘긴 18일에야 치러졌다. 그의 신학 견해가 못내 거슬렸던 ‘믿음 좋은’ 사람들이 그가 교회 묘지에 묻히는 걸 저지했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가족묘지에 안장되었지만 그 무덤의 정확한 위치는 아무도 모른다. ‘인정 투쟁’ 자체를 하찮게 본 그로서는 이보다 절묘한 마무리가 없겠으나, 그것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의 운명일진대 새삼 등줄기가 시리다.
구미정(숭실대 초빙교수)
[시온의 소리] 날지 못하는 기러기
입력 2017-11-17 0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