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술에 관대하다. 만19세에 음주가 허용되고, 야외에서 음주가 불법인 나라도 많지만 한국은 어디서든 술을 마실 수 있으며, 편의점은 24시간 술을 판다. 불법이지만 편의점 주변 테이블에서 음주하는 모습도 쉽게 볼 수 있다. ‘○○술집’이라는 케이블 채널 프로그램에서는 음주 무용담이 이어지며, ‘우정주’ 제조법을 자랑하고, 술자리 문화를 모른다고 핀잔을 주기도 한다. 유명 가수가 나오는 지상파 예능프로그램에서는 소주모양 정수기와 소주 분수까지 등장하고, 집을 포장마차 분위기로 만들어 파티도 한다. 지상파 드라마에서는 편의점에서 텀블러에 맥주와 소주를 섞어 마시는 장면, 남자가 폭탄주로 여자를 시험하고 여자가 술을 매개로 남자의 마음을 얻는 장면도 나온다.
이런 프로그램 대부분이 청소년 시청가능 등급이라는 점은 심각한 문제다. 청소년은 음주 장면에 더 자극받을 수 있는데 어릴수록 ‘위험감수 성향’이 높을 뿐 아니라 입시경쟁과 스트레스 속에서 미디어가 해방감을 맛보게 하는 유일한 통로일 수 있다. 술 광고는 규제하면서 음주 장면이 만연하는 행태에 미디어 전문가뿐 아니라 공중의 비판도 요구된다. 연구에 의하면 음주 장면에 자주 노출될수록 음주량이 많아지고, 음주 시작 연령이 빨라진다. 더 큰 문제는 미디어 속 음주 장면이 현실과 너무 다르다는 점이다. 실생활에서는 차를 마시거나 밥을 먹으며 대화하는 경우가 더 많고, 음주가 사랑과 성공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없다. 소주 모양 정수기나, 호프 기계, ‘술장고’를 집에 두거나, 술집처럼 집을 꾸미고 파티하는 경우가 현실에서 얼마나 있겠는가.
미디어는 서민의 일상과 동떨어진 일부 부유한 연예인의 특이한 음주 장면을 부각함으로써 음주 유발은 물론 사회적 박탈감까지 증폭시킨다는 비판에 겸허해야 한다. 팍팍한 삶 속에서 서민들은 음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려 하지만 음주가 그 수단이 될 수는 없다. 미디어의 긍정적 묘사와 달리 음주는 질병 발생은 물론 업무·학업능력 저하, 사고, 대인관계 악화를 낳으며, 음주로 인한 폭력이나 공중질서 파괴는 처벌받는다. 음주 행위에 대한 미화나 왜곡된 묘사는 공중보건을 해치고 미디어 품격을 떨어뜨리며 국민 신뢰를 잃게 한다.
골프, 피트니스, 문화공연 등 다양한 레저활동이 있지만 시간과 비용이 부족한 서민들은 음주 유혹에 빠질 수 있고, 이 과정에서 쉽게 접하는 미디어의 영향력은 커진다. 레저활동을 충분히 즐기는 상류층 시각에서 벗어나 음주를 유발하는 사회적 맥락을 이해함을 바탕으로 절주 캠페인을 전개해야 한다. 이 점에서 보건복지부와 한국건강증진개발원이 지원한 절주 전문가 협의체가 ‘절주문화 확산을 위한 미디어 음주장면 가이드라인’을 제정한 것은 의미가 크다. 미디어는 현실을 재구성해 음주에 대해서도 스토리에 맞게 각색해 재현할 수 있다. 그러나 일부 연예인의 희귀한 음주 행태의 미화는 서민들에게 박탈감과 함께 또 다른 음주 동기를 유도할 수 있다. 나이나 서열에 의해 음주가 강요되고, 음주에 대한 자기결정권이 무시되는 장면, 폭음을 남성다움으로 음주를 여성의 성공을 위한 수단으로 재현하는 방식도 지양돼야 한다.
복지부 자료에 따르면 저소득층이 음주와 흡연을 더 많이 하고, 고소득층은 운동, 검진 등 건강관리에 더 많이 투자하며, 이는 계층 간 기대수명의 격차로 연결된다. 술을 강요하는 권위주의와 술 중심의 회식문화도 변해야 한다. 청소년과 청년층을 위한 복지와 레저 기회를 확대하는 것도 절주 사회를 위한 방안이며, 이런 대안을 적극 알리는 것은 미디어의 사회적 책임을 실천하는 첫걸음이다. 언론의 자유는 국민의 알권리에 기여할 때 의미가 있지만 왜곡된 음주 장면의 묘사와 연결되는 개념은 아니다. 공중이 수동적 수용자에 머물지 말고 음주 미화 및 유발 콘텐츠를 비판하고 미디어의 사회적 책임을 촉구하는 것도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데 기여할 것이다.
정의철 상지대 언론광고학부 교수
[기고-정의철] ‘미디어 속 음주’ 문제다
입력 2017-11-15 17:43 수정 2017-11-15 21: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