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은 늦은 나이인 32세(1576년)에 급제한다. 같은 해 12월 동구비보(함경도 삼수)의 권관(종9품)으로 발령을 받는다. 그곳에서 임기를 마친 이순신은 1579년 2월부터 서울에서 살게 된다. 훈련원 봉사(종8품)로 승진한 덕분이었다. 하지만 서울 생활은 겨우 몇 달로 끝나고, 그해 10월 충청 병영(서산 해미읍성)의 군관(종8품)으로 전임된다. 정4품 병조정랑(국방부 인사과장 정도) 서익이 자신의 친지를 특별 승진시키려 하는 것을 보고 ‘규정 위반’이라며 반대하다가 보복으로 좌천된 것. 열 달 지난 1580년 7월 종4품 발포만호로 발령을 받는다. 육군으로 복무하던 이순신의 수군(水軍)초임지가 지금의 고흥군 도화면 발포리다.
만호로 근무하던 중 직속 상관인 전라 좌수사 성박이 ‘거문고를 만들려 하니 발포 뜰의 오동나무를 베어서 보내시오’라는 연락을 받는다. 이 때 보낸 답장이 ‘나라의 재물이니 아무도 함부로 베어갈 수 없다’였다. 고흥 사람들은 이순신의 기개와 청렴을 기념해 발포 관아 자리에 오동나무를 심었다. 고흥군도 그 자리에 이순신의 청렴강직했던 정신을 기리기 위해 ‘발포만호 이순신 오동나무터’와 ‘청렴광장’을 조성했다.
이순신은 만호로 일한 지 18개월 된 1582년 1월 관직에서 쫓겨난다. 왕명을 받아 지방 실태를 조사하는 군기경차관(軍器敬差官)은 이순신의 무기 관리가 엉망이라고 보고했고, 보고서를 받은 조정은 이순신을 파직한 것. 당시 군기경차관은 서익이었다. 이순신은 넉 달 뒤 도로 종8품 훈련원 봉사로 복직된다. 이순신 장군의 흔적이 발포역사전시체험관에 오롯이 남아 있다.
체험관을 나오면 ‘열녀 송씨 동상’이라는 글자가 뚜렷한 홍살문이 있다. 홍살문을 지나 50m가량 걸으면 이내 바다로 떨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느껴지는 커다란 바위가 벼랑에 걸쳐 있다. ‘진명(盡命)의 열녀 송씨의 순절’이라는 제목의 기록화가 바위 앞에 있고, 바위 끝에 두 아이와 함께 이곳을 찾은 어머니의 동상이 있다.
송씨는 임진왜란 당시 발포만호였던 황정록의 부인이다. 황정록은 발포만호 부임 초부터 이순신 막하에서 많은 해전에 참전, 전공을 세웠다.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모함으로 파직되자 황정록은 장군으로 발포 함대를 이끌고 출동해 칠전량 싸움에서 적탄에 맞아 장렬히 전사한다. 남편의 비보를 전해 들은 송씨는 “남편이 왜놈들 총탄에 맞고 죽임을 당하였는데 장차 우리도 더러운 왜적의 손에 죽임을 당할 것이거늘 우리만 살아서 무엇 하겠느냐”며 절벽에서 바다로 몸을 던져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어부들의 삶의 터전인 발포항은 고려 말, 조선 초엔 왜구가 창궐했다. 1439년(세종 21년) 발포진이 설치됐다. 발포만호성은 1490년(성종 21년)에 만들어져 1894년에 폐지된 산성이다. 전라좌수영 산하의 오관·오포 중 수군만호가 다스리던 수군진성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좌수영 산하의 수군기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여수선소(船所) 유적과 함께 당시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기초 자료가 되는 전남도 기념물 27호 문화재이다.
성벽은 항아리 비슷한 사다리꼴로 전체 둘레는 560m이고 높이는 약 4m이다. 외부만 석재로 쌓고 내부는 흙으로 경사지게 처리했다. 아래 기단부에는 큰 자연석을 이용해 돌과 돌 사이를 잘 물리게 했다. 동서남북 4벽이 거의 원래 모습대로 남아 있으나, 동벽과 남벽은 민가의 담으로 됐다. 동벽이 서벽보다 낮다. 성곽 아래로 발포 앞바다가 내려다보인다. 성 안에는 우물터와 선소터도 있다. 이 선소터에서 거북선의 하단부가 건조된 것으로 전해진다. 성 언덕 아래엔 작은 만(灣)이 나 있다. 굴강(屈江)이다. 거북선을 비롯해 3척의 병선이 유사시를 대비해 정박해 있었다고 알려졌다.
발포리 선창에 고깃배들이 여러 척 떠 있다. 뱃사람들은 해산물 수확에 여념이 없다. 가까운 바다에는 김·파래 등을 양식하는 시설이 빼곡하다. 시선을 남서쪽으로 멀리 두면 해안에 석문(石門)처럼 생긴 기암(奇巖)이 아스라이 보인다. 활개바위다. 마치 남국의 해변에서나 볼 듯한 한 폭의 그림이다.
조선시대 조운선이 쌀과 곡식을 싣고 서울로 가는 길에 큰 바람이 불면 쉬어 가는 곳이다. 이순신이 군사훈련을 전개했던 모습이 멀리서 돛대가 ‘활개 치듯 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설화도 전해진다. 임진왜란 때 발포 포구에 들렀던 이순신 장군이 활개바위 일대를 살펴본 뒤 발포만호에게 “이 바위 일대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니 경계를 늦추지 말라”고 지시했다. 발포만호가 “발포 포구도 있는데 어찌 이곳을 지키라 명하시냐”고 묻자 장군은 “이곳은 커다란 함선도 접안할 수 있는 지형이니 만일 왜군이 이곳으로 들어온다면 큰 낭패가 아닐 수 없다”고 답했다고 한다.
바위는 수직 절벽 끝에 붙어 있어 배를 이용하지 않으면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어렵사리 어선을 타고 가까이 다가가 본 바위는 높이 약 15m, 폭 약 3m로 가운데가 뻥 뚫려 있다. 석문 위에 올라서면 발포로 접근해 오는 적들의 동향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을 듯 보였다.
■ 여행메모
고흥 역사문화를 한눈에 ‘분청문화박물관’
녹는 듯 부드러운 삼치회… 초겨울 최고 별미
승용차로 가면 남해고속도로 고흥나들목에서 나와 고흥방면으로 우회전한 뒤 한천교차로에서 15번 국도를 탄다. 우주항공로를 따라 가다 세동삼거리에서 우회전해 855번 지방도를 타고 도화면 당오삼거리에서 좌회전해 가면 발포항에 닿는다. 발포항에는 관광유람선이 없다. 활개바위에 가까이 접근하려면 어선을 빌려 타야 한다. 요즘처럼 해상작업이 바쁜 시기에는 돈 주고도 배 구하기가 힘들다.
고흥에 새로운 볼거리가 생겼다. 두원면 운대리에 지상 3층, 연면적 9720㎡ 규모의 고흥분청문화박물관(사진)이 지난달 31일 문을 열었다.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고흥의 모든 역사문화자원을 전시, 관람, 체험할 수 있다. 1층 역사문화실에는 분청사기와 운대리 가마터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전시하는 분청사기실, 고흥의 대표적인 설화를 소개하고 설화 관련 자료와 콘텐츠 성과물을 전시하는 설화문학실이 마련됐다. 2층에는 고흥군민 기증 유물을 전시하는 기획전시실과, 한국·중국 등 아시아 도자기를 비교할 수 있는 특별전시실이 들어섰다. 개관 기념으로 1943년 두원면 성두리 일원에 떨어진 낙하운석을 볼 수 있는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이즈음 고흥의 먹거리로 삼치회가 유명하다. 녹는 듯한 부드러운 질감의 삼치회는 먹는 방법이 독특하다. 김에 밥을 조금 올린 뒤 삼치 한 점을 양념간장에 푹 찍어 묵은지와 함께 싸먹는다. 담백하고 풍성한 맛이 일품이다.
고흥=글·사진 남호철 여행선임기자 hc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