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드 알 하리리 레바논 총리의 갑작스러운 사의 표명에 이어 그의 행방불명이 중동 정세를 흔들고 있다. 레바논 정부는 하리리 억류 및 사임 강요 의혹을 받는 사우디아라비아에 해명을 촉구하며 정면 대응에 나섰다. 사우디 정부는 아랍 내 주도권을 강화하기 위해 이슬람 국가의 불문율을 깨고 이스라엘과 손잡았다는 의심도 받고 있다.
미셸 아운 레바논 대통령은 11일(현지시간) 성명에서 사우디 측에 “하리리 총리가 레바논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막고 있는 이유를 분명히 하라”고 요구했다. 이어 “하리리 총리가 일주일 전 사의를 밝힌 뒤 행방이 묘연한 상황은 그가 선언한 입장과 행동에 진실성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덧붙였다.
지난 3일 사우디를 방문한 하리리는 다음날 TV 연설을 통해 돌연 총리직 사임 의사를 발표해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레바논 무장정파 헤즈볼라를 이용한 이란의 내정간섭을 비판하고 자신에 대한 암살 위협을 언급했다. 하리리는 이후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레바논 정부는 사우디 정부가 하리리를 억류한 것으로 보고 있다. 아운 대통령이 “하리리 총리가 납치됐다”고 말했다고 로이터통신이 레바논 고위 관료를 인용해 전했다. 또한 하리리가 사우디 도착 후 전화기를 압류당했으며 TV에 나와 사의를 표명하도록 강요당했다고 통신은 전했다. 오는 15일 파리에서 하리리를 만날 예정이었던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11일 “레바논 정치 지도자들은 이동의 자유를 누려야 한다”며 이번 사태에 우려를 드러냈다.
하리리의 사의 표명은 레바논을 사우디-이란 간 주도권 싸움의 한복판으로 밀어 넣었다. 사우디와 이란은 각각 이슬람 수니파와 시아파의 맹주를 자처하며 중동 내 헤게모니 쟁탈전을 주도하고 있다. 레바논은 사우디와 친밀한 관계인 하리리가 이란의 지원을 받는 헤즈볼라와 긴장 관계를 유지하던 상황이었다. 뉴욕타임스는 하리리 행방불명 사건이 사우디 왕세자의 정적 숙청과 함께 중동 내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렉스 틸러슨 미국 국무장관은 레바논을 대리전 장소로 이용하려는 중동 국가들에 경고했다. 틸러슨 장관은 성명에서 “레바논에는 레바논 정부의 합법적인 군대 이외에 다른 무장 세력이 차지할 장소나 역할이 없다”며 “미국은 레바논 정부와 그 정치기구들의 주권과 독립성을 강력히 지지한다”고 밝혔다. 다만 사우디의 하리리 억류설에 대해서는 “그럴 가능성이 없다”며 “사우디 외무부로부터 하리리 총리의 독자적 결정이었고, 그는 자유로운 상태에 있다는 확답을 들었다”고 말했다.
사우디 정부 역시 하리리가 스스로 사임을 결정했다는 입장을 내놓고 있다. 사우디 당국은 하리리가 11일 수도 리야드에서 열린 기념식에 참석해 살만 국왕을 접견했고 오후에는 터키와 영국 대사를 만났다고 전했다.
사우디 정부는 이스라엘 연계설도 적극 부인했다. 아델 알주바이르 사우디 외무장관은 지난 9일 미국 CNBC방송 인터뷰에서 “그런 뜬소문에 답하지 않겠다”고 답했다.
강창욱 기자 kcw@kmib.co.kr
사우디에 억류? 은신?… 레바논 총리 실종사건
입력 2017-11-13 0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