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가 피어오르는 밤의 호숫가. 흰옷을 입은 발레리나들의 질서 정연한 백조 군무는 더할 나위 없이 매끈했다. 샤삭 샤삭, 군무가 내는 토슈즈의 리드미컬한 소리에 취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 들었다.
압권은 인간의 춤일까 싶을 정도의 실력을 보여준 프리마돈나였다. 프리마돈나를 더욱 빛나게 해준 군무의 탄탄한 기량은 ‘정통 발레의 진수’라는 수식어가 왜 붙는지를 실감케 했다.
지난 10일 밤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 러시아 마린스키발레단이 선보인 발레 교과서의 명작 ‘백조의 호수’에 갈채가 쏟아졌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기반을 둔 마린스키발레단은 모스크바 볼쇼이발레단과 쌍벽을 이룬다. 이번 방한엔 마린스키 극장 블라디보스토크 분관인 프리모스키 스테이지 발레단이 군무를 담당했다.
차이콥스키 발레 음악의 대표 레퍼토리인 ‘백조의 호수’는 프리마돈나가 관전 포인트다. 백조 오데트와 흑조 오딜 1인2역을 해야 해서다. 스토리는 이렇다. 지그프리트 왕자의 생일. 여왕은 왕자에게 다음 날 무도회에서 신부를 결정하라고 한다. 그날 밤, 왕자는 호숫가 백조 무리 속에서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한 오데트를 만난다. 오데트는 마법에 걸려 낮에는 백조로 살며 밤에만 사람으로 돌아온다. 저주는 한 사람의 변치 않는 사랑이 있어야 깨질 수 있다. 왕자는 오데트에게 사랑을 맹세한다. 하지만 무도회에서 마법사의 농간으로 엉뚱한 여인을 신부로 맞이하겠다고 한다. 마법사가 자신의 딸인 흑조 오딜을 오데트로 변신시켰던 것이다. 사실을 알게 된 왕자는 호수의 오데트에게 달려가 다시 사랑을 다짐하고, 마법사와 싸워 이긴다.
발레단의 수석 무용수인 빅토리아 테레시키나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프리마돈나였다. 르네상스 화가 보티첼리가 그린 ‘비너스의 탄생’의 여신처럼 9등신을 연상시키는 긴 몸이 만들어내는 섬세한 동작은 고혹적이었다. 백조를 연기할 때는 아련했고 흑조에서는 180도 변신해 힘이 넘쳤다. 마침내 사랑을 얻었을 때 32번 가까이 회전하며 기쁨을 표현할 땐 관객들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날 무대에선 한국이 낳은 세계적 발레리노 김기민이 왕자 역을 맡았다. 5년 만의 고국 무대다. 탄력적인 점프와 중력을 무시하는 듯한 긴 체공시간으로 유명한 그는 소문대로였다. 관람석에선 “날아다니는 것 봤지”라는 감탄사가 교차했다. 사랑하는 오데트를 쫓아 무대를 사선으로 가로지르며 그야말로 날아다녔다. 지난해 한국 발레리노 최초로 무용계 아카데미상이라 불리는 ‘브누아 드 라 당스’에서 최고 남자 무용수상을 받았다. 솔로에선 종횡무진 기량이었으나 듀엣 춤을 출 때는 동작이 조심스러워 다소 안타까웠다. 두 주역 모두 표정 연기가 좀 더 가미됐더라면 드라마성이 강화됐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들었다. 그럼에도 탁월한 기량이 소낙비 같은 즐거움을 주는 무대였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공연 리뷰-러시아 마린스키발레단 ‘백조의 호수’] 인간의 춤, 그 이상이었던 프리마돈나
입력 2017-11-13 0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