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NA 편집’ 크리스퍼 유전자가위… 인류가 발견한 ‘제2의 불’

입력 2017-11-10 05:00
올여름 개봉한 영화 ‘옥자’는 산골소녀 미자와 유전자 조작으로 태어난 슈퍼돼지 옥자의 우정을 그린 작품이었다.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로 대표되는 생명 편집의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어 옥자 같은 슈퍼돼지의 출현은 현실이 될 수도 있다. 넷플릭스 제공
자유자재로 자르고 붙이고
생명공학 신기원
병충행 없는 상추 등 응용
암·에이즈 치료 전기 기대
그런데, 인간배아 ‘가위질’ 괜찮나?

영국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에서 간명한 비유로 인체를 설명했다. 그의 비유를 옮기자면 우리의 몸은 하나의 건물이다. 건물엔 수많은 사무실이 입주해 있는데 짐작하다시피 이들 사무실은 곧 세포를 의미한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핵’이라는 이름의 책장이 등장한다. 책장에는 염색체라는 책 46권이 꽂혀 있다. 유전자는 바로 이들 책의 페이지다. 여기엔 누대에 걸쳐 대물림되는 인체의 메커니즘, 곧 인간의 설계도가 담겨 있다.

그렇다면 ‘김홍표의 크리스퍼 혁명’에서 중점적으로 다뤄지는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쉽게 말하자면 유전자에 새겨진 오자를 고치고 탈자를 채워 넣는 기술이다. 모든 생명체의 유전자를 자유자재로 조작할 수 있는 요술봉인 셈이다.

워낙 전도유망한 기술이어서 학계 안팎에서는 “인류가 발견한 제2의 불”이라는 평가까지 나온다. 서점가에도 최근 이 기술을 다룬 신간은 간단없이 쏟아지고 있다. 일본의 NHK 게놈 편집 취재반이 펴낸 ‘생명의 설계도 게놈 편집의 세계’(바다출판사), 전방욱 강릉원주대 교수가 쓴 ‘DNA 혁명 크리스퍼 유전자가위’(이상북스)가 대표적이다.

김홍표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가 내놓은 ‘김홍표의 크리스퍼 혁명’ 역시 마찬가지다. 크리스퍼 유전자가위의 실체와 가치를 전하는 과학교양서다. 근사한 비유와 친절한 설명이 돋보이는 신간인데, 살뜰한 목소리로 독자를 이끄는 생명공학 가이드북이라고 할 수 있다.

김 교수는 수많은 과학 용어를 하나씩 설명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각종 과학 용어를 명쾌하게 정의하면서 유전 정보는 무엇이며 DNA 사슬은 어떤 얼개를 띠는지 개괄한 내용이 전반부를 장식한다. 과학책이 낯선 독자라면 얼마간 인내심이 필요할 것이다.

일단 크리스퍼 유전자가위에서 ‘크리스퍼(CRISPR·Clustered Regularly Interspaced Short Palindromic Repeats)’가 무엇인지 알아보자. 해석하자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주기적으로 분포하는’ DNA의 반복 서열이다. DNA 염기 사슬 중 일부는 ‘소주 만 병만 주소’처럼 앞으로도, 뒤로도 읽을 수 있는 회문(回文)의 구성을 띤 게 특징이다.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는 이런 형태를 응용해 “건초 더미에서 바늘 찾듯” 문제점을 발견한 뒤 유전자를 자르거나 이어 붙이는 기술이다.

1990년대부터 유전자가위는 존재했지만 2010년대 들어서면서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로 명명된 진일보한 기술이 등장했고, 유전공학의 세계는 크게 출렁였다. 과거의 기술보다 정확하고 빠르고 저렴해진 게 특징인데, 김 교수의 설명을 그대로 옮기자면 이 정도 수준이다.

“크리스퍼 유전자가위의 위력은 1시간에 100㎞를 능히 축지하는 자동차 바퀴로 비견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지금껏 사용했던 유전자가위는 음풍농월하던 달구지나 자전거 바퀴에 불과하다고 느낄 정도로 빠르게 뒷걸음질 치며 시야에서 사라지는 느낌이 든다.”

이 기술 덕분에 세상은 이미 달라지고 있다. 곰팡이에 내성을 갖춘 바나나가 등장했고 병충해에 강한 상추가 나왔다. 중국은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를 응용해 모기를 박멸하는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암이나 후천성면역결핍증(에이즈) 치료에도 획기적인 전기가 마련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알츠하이머병이나 파킨슨병처럼 유전적 요인이 작용하는 질병의 치료는 말할 것도 없다. 이 기술을 다루는 회사도 여럿 등장했다. 나스닥에 상장된 기업도 있다. 전문가들은 2021년엔 관련 시장의 규모가 6조30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한다.

확연하게 달라진 생명공학의 그라운드를 묘사하면서 사방치기를 하듯이 전개되던 이야기는 후반부에선 생명윤리에 대한 논의로 뻗어나간다. 유전병 치료를 명분으로 내세워 인간 배아에 유전자가위를 갖다 대도 괜찮은지, 이 기술에 윤리적 맹점은 없는지 살핀 내용이다.

김 교수는 “인류의 건강과 질병의 치료에 적절히 사용될 수 있도록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아야 한다”며 “그런 점에서 우리는 과학을 재미있게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고 적었다. 생명과학 입문서로도 손색없고 미래를 내다본 예언서로서도 무리 없이 읽힌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