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동 칼럼] 부끄러움을 모르는 권력이라면

입력 2017-11-07 17:39

시인 윤동주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이라며 스스로를 경계했다. 부끄러움을 아는 것조차 어려운 세상이니 우리로서는 감히 흉내조차 내기 힘들다. 죽는 날까지는 고사하고 일상에서도 부끄러운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솔직히 부끄러움은커녕 아쉬움 없이 하루를 살아가는 것도 쉽지 않다. 대개 부끄러워하고, 후회하고, 반성하면서 살아간다. 때론 잘못인줄 알면서도 부끄러운 행동을 한다. 그러고선 겸연쩍음에 머리를 긁적이거나, 잘못했다며 고개를 숙이거나, 그도 아니라면 입이라도 다문다. 상식이다. 사람과 동물의 근본적인 차이도 이 점에 있다.

공자는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 용기라고 했다. 부끄러움은 양심의 또 다른 말이다. 부끄러움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사회적 감정이다. 오죽했으면 맹자는 부끄러운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라고 했을까.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하지만 부끄러움을 아느냐, 모르냐는 하늘과 땅 차이다. 부끄러움을 알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면 살 만한 사회다. 유대인 학살의 부끄러움에서 생명 존엄성을, 흑인 또는 남녀 차별의 부끄러움에서 인권과 평등을 알았다. 이런 거창한 것 말고도 새치기의 부끄러움을 통해 질서의 가치를 키웠다. 정의와 평등의 출발점도, 문재인정부가 강조하는 사람다운 세상의 바탕도 여기에 있다.

상식이 있다면 의당 판단이 설 것 같은 사안에도 궤변과 견강부회로 위기를 모면하려는 지식인들이 의외로 많은 걸 보면 도덕성이나 정의감은 사회적 지위나 경제력에 반비례한다는 느낌이 든다. 홍종학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후보자도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남들보다 많이 배우고, 월등한 경제력을 갖춘 그의 속과 겉이 이렇게 다를 줄 미처 몰랐다. 그는 정의로웠고 공정하며 약자에 대한 배려가 넘쳐흘렀다. 양심적 지식인의 표상이 따로 없었다. 적어도 그에 대한 인사청문회는 ‘통과의례’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오죽했으면 진보세력 내에서조차 “이건 아니다”라는 비판이 나올까.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우리에겐 사치인가. 더욱이 부끄러움마저 느끼지 않는 모습엔 절망감마저 든다.

홍 후보자의 위선(僞善)과 말 따로, 행동 따로는 심대한 공직 결격사유이지만 더 이상 거론하지 않겠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충분히 지적했고, 나까지 보탠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기 때문이다. 절세 자체를 비난할 근거 또한 없다. 그의 말대로 상속이나 증여도 세금을 제대로 냈다면 이 역시 탓할 일이 아니다. 이 점에서 자연인 홍종학은 억울하다. 다만 장관 후보자 홍종학이라면 달라진다. 장관은 인허가는 물론 기업의 존망에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중기부 설립은 새 정부의 정책적 이념과 맞닿아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문제에 대한 답은 정해져 있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정부와 여권의 인식이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홍 후보자의 절세 논란과 관련, ‘합법적이고 상식적’이라고 했다. 그의 위선을 문제 삼는 언론을 향해선 “(기자) 여러분도 (기사) 쓴 대로 살아야 되지 않는가”라고 했단다. 이 무슨 해괴한 변명인가. 한 여당 의원은 “홍 후보야말로 갑의 횡포를 막아내는 데 앞장선 ‘경제민주화 전도사’로 장관 적임자”라고 한술 더 떴다. 나아가 “언론이 부의 대물림에 대해 강한 문제의식을 함께 공유하고 있다는 것에 희망을 봤다. 차제에 뜻을 모아 부자증세에 뜻을 모아줬으면 좋겠다”고 엉뚱하게 엮어내는 기술까지 발휘했다. 황당하다.

공사(公私) 구분이 이렇게 안 될까. 부끄럽지 아니한가. 시쳇말로 어이상실이다. 아니길 바라지만 만일 이것이 사적 인식을 넘어 정부의 집단적 인식이라면 정말 위험하다.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것은 없다. 더욱이 권력을 가졌다면. 부끄러움 없는 권력의 말로를 보지 않았던가. 민심은 마냥 머물러 있지 않는다.

박현동 논설위원 겸 국민CTS대표 hd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