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배병우] ‘쓸모없는’ 문과전공자의 힘

입력 2017-11-06 17:21

문과를 전공한 대졸자에 대한 천시가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문송합니다(문과라서 죄송합니다)’, ‘인구론(인문계 졸업생 90%가 논다)’이라는 신조어가 나돌기 시작한 게 이미 수년 전이다. 필자가 속한 신문사의 올해 신입사원 지원자들의 서류를 심사하다가 새삼 문과 전공자들의 고충을 실감했다. 올해 지원자 수백 명 중 90% 이상이 인문·사회계열을 중심으로 한 문과 전공자들이었다. 올해 회사가 뽑을 인원은 10명 안팎이다.

기업의 논리는 이렇다. 빨라진 기술변화에 적응하고 현장에 바로 써먹을 수 있는 인력을 구하다보니 이공계를 선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국내 수출 대기업 대부분이 제조업에 특화돼 있다는 점도 영향을 줬을 것이다.

유럽보다 ‘리버럴 아츠(liberal arts, 기초교양)’ 전통이 더 강하게 남아 있는 미국에서도 인문학의 위기와 문과 전공자들의 취업 문제가 제기된 지 꽤 됐다. 미국 문과 학생들도 대학 졸업 후 무엇을 할 것이냐는 성가신 질문을 받기 십상이다. 이는 디지털시대에 인문학이 무슨 쓸모가 있느냐는 물음이기도 하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한 스템(STEM)교육은 인문학의 위기를 상징하는 단어다. 스템은 과학(science) 기술(technology) 공학(engineering) 수학(mathematics)의 머리글자로, 과학과 수학 중심의 통합교육을 일찍부터 학생들에게 시행하는 프로그램이다.

하지만 인공지능(AI)과 로봇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변화의 선두에 서 있는 미국에서 최근 문과 홀대에 대한 반성론이 크게 일고 있음은 주목할 만하다. 올 들어서만 최소 5권의 묵직한 저서들이 문과의 재발견을 깊이 있게 다뤘다.

실리콘밸리의 저명한 벤처캐피털리스트 스콧 하틀리는 지난 5월 출간한 ‘퍼지 앤드 테키(The Fuzzy and the Techie)’에서 향후 디지털세계의 판도를 바꿀 혁신의 주도자는 ‘퍼지’들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퍼지는 인문·사회계열 등 문과 전공자, 테키는 이공계 전공자를 가리킨다. 그는 지난 수십 년간 테키들이 산업계의 혁신을 주도한 걸로 알려졌지만, 실은 기술적, 사회적 도전을 인간적 맥락에서 사고할 줄 아는 퍼지들의 역할이 그 이상이었다고 강조한다. 그는 스템 이외 분야에 대한 교육의 무용함을 강조하는 일부 실리콘밸리 지도자들을 강하게 비판한다. 기술적 전문성을 획득하기 위해 특별한 훈련이 필요했던 많은 업무들이 4차 산업혁명으로 단순한 수단으로 가능해지는 등 기술 분야에 대한 진입 장벽이 낮아지고 있다. 이제 중요한 것은 당신이 보유한 기술이 아니라 결론에 이르게 된 사고과정이다. 결국 이는 인문학적 소양과 관련된다.

한국에도 번역 출간된 ‘센스메이킹’에서 컨설팅업체 레드어소시에츠의 크리스티안 마두스베르그 창립자는 빅데이터 토대의 알고리즘이 모든 답을 줄 것이라는 희망에 도취되어 있지만 그것은 명백한 착각이라며 우리 문제를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철학 차원의 비판적 사고로 돌아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당신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You Can Do Anything)’와 ‘또 다른 실용교육: 문과 전공자가 훌륭한 직장인이 되는 이유(A Practical Education: Why Liberal Arts Majors Make Great Employees)’는 지난 8월 뉴욕타임스에 서평이 실렸다. 두 책의 저자는 미묘한 사회적·정서적 단서 판독 능력, 효율적인 소통, 유동적인 환경에 대한 신속한 적응 등 인문학 교육이 가르치는 기능들에 대한 기술 분야의 수요가 커지고 있다면서 문과 전공자들에게 “(취업) 공포에 질리지 말라”고 한다.

문과 전공자들을 위로하기 위한 과도한 해석이 아니냐고? 결코 그렇지 않다. 한국의 기업들도 더 늦기 전에 퍼지의 가치를 재인식해야 한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고 있다.

배병우 편집국 부국장 bwb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