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판 용의 눈물? 차기 굳힌 왕세자 ‘혈육 숙청’
입력 2017-11-06 05:05
왕위계승서열 1위 빈 살만
반부패위원회 구성하자마자
‘부패와의 전쟁’ 명분 내세워
‘중동의 버핏’ 빈 탈랄 비롯
유력 왕자, 전현직 장관 등
무더기 기습 체포 감행
사우디아라비아판 ‘왕좌의 게임’이 한창이다. 지난 6월 사촌으로부터 왕위 계승서열 1순위 자리를 빼앗은 무함마드 빈 살만(32) 사우디 왕세자가 ‘부패와의 전쟁’을 명분으로 또 다른 유력 왕족을 체포하는 등 혈육 간 권력투쟁이 극에 달했다.
아랍권 알아라비야방송 등은 4일(현지시간) 빈 살만 왕세자가 지휘하는 반(反)부패위원회가 알왈리드 빈 탈랄(62) 등 왕자 최소 11명과 현직 장관 4명, 전직 장관 수십명을 체포했다고 보도했다. 살만(81) 현 국왕의 칙령으로 반부패위가 구성된 지 수시간 만에 이뤄진 기습체포다. 주요 언론은 이번 사건을 빈 살만 왕세자의 권력승계 작업으로 본다. 다른 왕가 유력자들의 반격을 막으려고 선수를 쳤다는 것이다.
체포된 빈 탈랄 왕자는 ‘중동의 워런 버핏’으로 불린다. 애플과 트위터, 디즈니, 21세기 폭스 등 유수 글로벌 기업의 지분을 대량 보유했다. 경제지 포브스는 지난해 3월 빈 탈랄의 재산이 173억 달러(19조3000억원)에 이른다며 세계 부호 서열 41위에 올려놓았다. 여성권리 증진과 아동·청소년 교육 등에도 전폭 지원해 중동과 서구권의 경제·문화적 격차를 줄일 적임자로 꼽혔다. 빈 살만 왕세자가 유력 왕족인 빈 탈랄을 숙청 대상으로 삼은 건 그만큼 왕위 승계작업이 급박하게 돌아간다는 걸 보여준다.
앞서 살만 국왕은 지난 6월 21일 ‘수다이리 7형제’ 그룹의 일원인 조카 무함마드 빈 나이프(58)를 왕세자와 내무장관직을 포함한 모든 자리에서 내쫓고 아들 빈 살만 왕자를 새 왕세자에 책봉했다. 수다이리 7형제란 이븐 사우드 초대국왕의 총애를 받은 8번째 아내 수다이리 왕비의 아들 7명을 일컫는다. 이 중 넷째인 살만 국왕이 2015년 왕위에 오르면서 조카 빈 나이프 왕자를 왕세자로 책봉하자 수다이리 7형제가 권력을 나눠 갖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그러나 빈 나이프가 왕세자 자리를 박탈당하고 내무장관 자리도 자신의 조카 압둘아지즈 빈 사우드 빈 나이프(34) 왕자에게 뺏기면서 이들 사이의 권력 서열도 재조정됐다.
‘태풍의 중심’ 빈 살만 왕세자는 아버지가 왕위에 오르는 데도 결정적 기여를 한 공신이다. 2015년 압둘라 국왕 서거 당시 권력투쟁에서 신속하게 주도권을 장악, 장례식도 열리기 전에 아버지의 즉위를 확정짓고 압둘라 국왕의 막후 실세들을 요직에서 쳐냈다. 아버지 즉위 뒤에는 30세의 나이에 세계 최연소 국방부 장관에 올랐다. 빈 살만 왕세자는 평소에도 하루 16시간 일하고 ‘손자병법’을 애독서로 꼽는 야심가로 알려져 있다.
빈 살만 왕세자는 앞으로도 반대파 탄압에 고삐를 더 죌 전망이다. 살만 국왕이 고령인 만큼 향후 승계 과정에서 생길지 모를 후환의 싹을 잘라놓겠다는 태세다. 지난 9월 사법 당국이 영향력이 큰 성직자와 자유주의 사상가 등 30여명의 저명인사를 체포한 것도 권력승계 작업의 일환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빈 살만 왕세자는 한편으로는 우호 여론을 형성하기 위해 최근 여성들에게 운전을 허용하고 경기장 가족동반 입장을 허용하는 등 개혁개방 조치도 병행하고 있다.
글=조효석 기자 promene@kmib.co.kr, 그래픽=공희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