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윤복희(71)는 한국에서 미니스커트를 처음 입은 여성으로 유명하다. 그럼 윤복희에게 이 짧은 치마를 만들어준 사람은 누굴까. 아흔의 현역 최장수 디자이너 노라노(본명 노명자)다. 한국영화 촬영 현장에서 “레디고”를 처음 외쳤던 첫 여성 감독 박남옥(1923∼2017)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두 여성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 나란히 나왔다.
노라노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외조부가 대한제국 영친왕의 영어 교사였다. 노라노는 옷 영화 책에 열광한 소녀였다. 경기여고 시절엔 어머니의 옷에 하이힐을 신고 숙녀인양 영화관을 드나들었다는 일화는 진취적인 성향을 짐작케 한다. 해방 직전인 1944년 유학을 준비했지만 식민지 조선인의 유학이 전면 금지됐다. 설상가상으로 정신대로 끌려갈 상황에 놓이면서 결혼을 하게 된다. 그런데 남편의 참전으로 열아홉에 원치 않게 이혼한다.
“제가 열심히 살 수 있었던 원동력 가운데 하나가 ‘분노’라고 생각해요. 제 분노는 이혼하면서 생겨났죠. ‘분노’ ‘결핍’ 이런 것들이 있어야 뭔가 이루어내는 것 같아요.” 해방과 전쟁통에 가세는 급격히 기울고 노라노는 가족들을 건사하기 위해 일을 했다. 그러다 남다른 패션 감각을 눈여겨 본 유력 인사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을 가게 된다.
유학 전 새로운 이름을 만들었다. ‘노라.’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 여주인공 노라의 이름이다. 노라는 가부장적 남편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난다. 노라란 이름 뒤에 자신의 성을 붙인 ‘노라노’는 그의 새 이름이자 패션 브랜드가 된다. 노라노는 이 이름에 어울리는 삶을 기어이 살아간다. 미국 유학 후 56년 국내 최초의 패션쇼를 열었고, 66년 최초의 기성복을 도입했다. 윤복희 엄앵란 등의 스타일리스트가 됐다. 연간 1000만 달러 이상의 수출 실적을 올리기도 했다.
노라노 평전은 그를 10년간 관찰하며 취재해온 기자가 저자다. 노라노가 스스로 남긴 기록, 저자가 그와 주변 인물로부터 들은 이야기, 다양한 사진과 자료는 노라노의 생애를 객관적이면서도 풍부하게 드러낸다. 술술 읽힌다. 유년부터 노년까지 패션 디자이너 1호의 삶은 한국 패션사이기도 하다.
박남옥의 책은 자서전이다. 외동딸 이경주가 생전에 그가 써놓은 원고를 그러모아 출판사에 보내온 것이다. 박남옥은 이화여전에 입학했다 중퇴한 뒤 신문기자로 일하며 영화평을 썼다. 54년 극작가 이보라와 사이에 딸을 낳았는데 출산 후 보름 만에 영화 ‘미망인’ 제작에 나선 억척이였다.
매일 손수 장을 봐 10여명의 스태프 밥을 해 먹였다. 제작 중 녹음실을 빌리러 갔다 “연초부터 여자 작품을 녹음할 수 없다”는 얘기를 듣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남편에게 이혼 통보를 받고선 ‘헤어지는 것이 무슨 대수냐’ ‘내 고생도 끝이 났구나’라고 안도하면서도 회한의 눈물을 흘린다.
직접 써서 박남옥의 육성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온갖 고생담에 눈물이 나는가 하면 어려움 속에서도 너무나 꿋꿋한 모습에 슬며시 웃음이 난다. “나 홀로 남아서 생각한다. 인생이란 별거 아니었다는 생각과 인생은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다 하는.” 박남옥이 인생의 황혼에 남긴 말이다. 악전고투한 그녀들의 삶이 더없이 애틋하면서도 소중해 보인다.
두 책은 출판사 마음산책이 ‘우리 여성의 앞걸음’이라는 기획에서 처음으로 내놓은 것이다. 정은숙 대표는 “한국 사회 각 분야에서 첫 발을 내딛은 여성의 생애와 그 목소리를 기록하는 작업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두 책을 읽고 나면 누구라도 다음 인물이 기대될 것 같다.
강주화 기자 rula@kmib.co.kr
패션·영화계 한국여성 1호… 노라노·박남옥을 아시나요
입력 2017-11-03 05:05 수정 2017-11-03 1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