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유럽연합(EU) 지역위원회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국민소득과 지방분권 수준은 정비례한다. 지방분권이 잘 돼 있는 나라일수록 국민들이 잘 살고 국가경쟁력도 높다. 중앙정부가 지방의 손발을 풀어줄 때 국가경쟁력 정체도 풀린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자주 하는 말이다. 박 시장은 현재의 지방자치를 "중앙정부가 시키는 것만 하라는 것"이라고 표현하면서 "지방정부의 자율권과 상상력, 혁신의 힘을 제약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분권(分權)이란 권력을 나눈다는 의미다. 지방분권은 중앙정부에 집중된 권력을 지방정부에 나눠주라는 요구다. 지방분권주의자들은 분권이 더 많이 이뤄질수록 주민들의 생활이 더 나아진다고 믿는다. 지방분권을 통해 중앙의 권력이 지방으로, 현장으로, 주민으로 이동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박 시장은 "모든 문제는 현장에 있고, 모든 해답도 현장에 있다"면서 주민들의 생활 현장과 밀착한 지방정부가 사회혁신을 주도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답은 하나가 아니다
인구 1000만이 사는 거대도시 서울의 문제와 지방의 문제가 같을 수 없다. 서울에선 집을 구할 수 없다는 게 문제라면, 지방의 오래된 중소도시들에서는 늘어나는 빈 집이 걱정거리다. 서울에서도 강남의 문제와 강북의 문제가 다르다. 이 차이를 모르거나 고려하지 않는 정책은 비효율적일 수밖에 없다.
실제로 주거 불안은 서울의 경쟁력을 갉아먹는 중대한 문제임에도 주거정책과 관련한 대부분의 권한을 정부가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서울시는 문제 해결에 한계가 있다. 심각한 전세난에도 불구하고 전세상한가 제정 등의 정책적 조치를 실시할 권한이 서울시에겐 없다.
자영업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대형마트 진입이나 프랜차이즈 입점을 규제하고 싶어도 하기가 어렵다. 젠트리피케이션을 막기 위해 상가 임대료 상한선을 낮춘다든가 임대 보장기간을 늘린다든가 하는 조치도 할 수가 없다. ‘상가임대차보호법’ 등 법이 바뀌지 않는 한 서울시 단독으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임대인·임차인 자율협약인 ‘상생협약’이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는 임시적 대책이 동원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최근 출간된 마강래 중앙대 교수(도시계획부동산학과)의 책 ‘지방도시 살생부’는 “앞으로 20년 후 지방자치단체의 30%가 파산한다”는 섬뜩한 경고를 전한다. 이 책은 서울과 지방의 문제가 얼마나 다른지, 획일적인 정부 정책이 얼마나 낭비적인지도 알려준다.
마 교수는 문재인 정부의 도시재생사업에 대해 지방 중소도시에서는 예산 낭비로 끝날 것이라고 우려한다. 지방도시의 원도심은 신도심이 생겨나면서 분산 효과로 쪼그라든 경우가 대부분인데, 원도심을 살리겠다고 도시재생을 하면 신도심이 다시 쪼그라드는 ‘시소 효과’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마 교수는 지방도시의 근본 문제인 인구 유출과 일자리 부족이 해결되지 않는 한 재생이나 부활을 목표로 한 사업들은 성공하기 어렵다고 본다. 그는 지방도시의 위축을 인정하는 쪽으로 지방정책의 대전환을 촉구하면서 지방도시가 가야 할 길은 ‘도시의 압축화’라고 주장한다. 도시재생사업도 원도심 재생이 아니라 원도심으로 압축화하는 방향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양성과 혁신에 대한 기대
서울에서 도시재생사업이 성공을 거뒀다고 해서 지방도시에도 이 사업이 좋은 건 아니다. 서울이 ‘차 없는 거리’를 만들고, ‘젠트리 조례’를 제정한다고 해서 지방에서도 필요한 건 아니다. 지방마다 도시마다 문제가 다 다르다. 규모가 다르고, 조건이 다르고, 자원이 다르다. 이 차이를 중앙정부가 일일이 헤아려 가면서 정책을 편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서울시지방분권협의회 부위원장인 이기우 인하대 교수(법학전문대학원)는 “서울의 문제를 결정할 때, 또는 종로구의 문제를 결정할 때, 국민 전체가 참여할 필요는 없지 않는가? 서울의 문제는 서울시민이 결정하면 된다. 그게 지방분권이다”라고 명쾌하게 설명한다.
지방분권은 중앙정부에 집중된 권한을 분산한다는 의미에 그치지 않는다. 분권은 지방화, 특성화, 전문화를 가능케 한다. 또 지방정부의 다양성과 상상력, 혁신을 자극한다. 지방정부의 혁신경쟁을 기대할 수도 있다.
정원오 서울 성동구청장은 지방분권시대를 기대하면서 서울숲에 대한 상상을 시작했다고 한다. 최근 삼표레미콘 공장 이전이 확정되면서 서울숲은 앞으로 더 커지게 됐다. 정 구청장은 “서울숲이 위치한 성동구가 서울숲을 관리하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종종 생각해본다”면서 “서울시에 서울숲은 관리하는 여러 공원들 중 하나지만 성동구에 서울숲은 유일한 공원이다. 우리가 더 서울숲을 잘 가꾸고 활용할 수 있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주민으로의 분권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26일 전남 여수에서 ‘지방분권 로드맵’을 발표하면서 지방분권 개헌에 힘이 실렸다. 이번엔 어떤 식으로든 지방분권이 진전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크다. 물론 국회의 저항, 중앙정부와 관료의 저항 등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이런 저항들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시민들의 지지가 필수적이다. 시민의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지방분권이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사이의 분권을 넘어 지방정부의 권력을 주민들과 나누는 ‘주민으로의 분권’이 따라와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주민 참여를 더 많이 보장하는 ‘시민참여형 지방분권’, 자치와 동반하는 분권이란 의미의 ‘자치분권’이란 말도 사용되기 시작했다.
핵심은 주민참여제도로 고안된 주민소환, 주민투표, 주민발의, 주민감사청구 등의 요건을 대폭 완화해야 한다는 것으로 모아진다. 문제가 있는 단체장이나 지방의원을 주민투표로 해임할 수 있게 한 주민소환제의 경우 시행된 지 10년이 됐지만 지난 2008년 경기도 하남에서 이뤄진 2건 외에는 사례가 없다.
문 대통령이 지방분권 의지를 재차 확인함에 따라 내년 6월까지 지방분권의 내용과 수준을 둘러싼 다양한 논의가 분출할 것으로 예상된다. 효율성과 주민자치를 앞세운 현재의 지방분권 논리가 돌파해야 할 질문들도 적지 않다.
우선 균형발전 문제가 있다. 중앙정부의 조정 기능이 약화되는 것이라면 지방분권이 지역간 불균형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우려다. 또 지자체와 지방의회에 대한 불신도 여전하다. 믿고 맡겨도 될 만큼 지방정치가 역량과 윤리성을 갖추고 있느냐는 질문이 있다. 이밖에도 전면 실시 대신 단계적 실시, 혹은 시범 실시를 주장하는 목소리도 있다.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
[‘주민의 시대’를 여는 키워드, 지방분권] 지방분권 잘된 나라, 삶의 질·국가경쟁력 ‘그뤠잇’
입력 2017-10-31 21: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