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잃고 무너졌던 마음
배움으로 위안 얻었어요”
일성여중고 ‘영어 말하기 대회’
10~80대 다양한 연령층 참여
대사 잊으면 격려의 박수 쏟아져
“왓 어 뷰티풀 데이, 나이스 투 시 유 에브리원.”
어설프지만 또박또박한 발음과 함께 연극이 시작됐다. 자명종 분장을 한 신덕례(47·여)씨가 ‘미녀와 야수’ 주제곡을 부르자 객석의 같은 반 ‘학우’들은 준비한 응원도구를 흔들며 연신 환호성을 질렀다. 무대 위 학생이 대사를 까먹을 때는 격려의 박수가 쏟아졌다.
붉은색 반티를 맞춰 입은 모습이 일반 중고등학생과 다를 게 없었다. 얼굴에 깊게 파인 주름만 나이를 가늠케 했다. 일성여중고 학생들의 ‘제16회 영어말하기대회’ 본선 무대는 30일 오후 2시 서울 마포아트센터 아트홀맥에서 이렇게 막을 올렸다.
일성여중고는 개인적인 이유로 중고교 정규 교육과정을 마치지 못한 이들을 위한 학력 인정기관이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배움을 이어갈 수 없었던 이들도 많다. 10대에서 8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학생들은 저마다 사연을 품고 무대에 올랐다. 연극과 유명인사의 연설문, 시낭송 등 내용도 풍성했다. 26팀이 예선전에 참가해 중학교 9팀과 고등학교 6팀이 본선에 오를 정도로 경쟁도 치열했다.
춘향전 변사또 역을 맡은 정연자(61·여)씨는 ‘문학소녀’였다. 정씨는 정규 학업과정 외에도 시낭송에 관심이 있어 시낭송 자격증을 땄다. 졸업을 앞둔 정씨는 사회복지학과와 문예창작과 사이에서 진로를 고민하고 있다. 그가 학업을 시작한 이유는 2015년 9월 남편이 별세하면서다. 그는 “사랑하는 남편이 암 진단을 받고 6개월 만에 하늘나라에 가면서 마음이 무너졌다”고 말했다.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던 정씨에게 딸은 “평소 소원대로 다시 공부를 해보는 게 어떠냐”고 권했다. 정씨는 “처음에는 남편을 잃은 상황에서 공부가 무슨 소용이냐고 말했지만 이것도 기회라는 생각이 들어 학교에 등록했다”고 했다. “학교에서의 2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모를 만큼 즐거웠고 마음의 위안을 얻었다”며 웃는 정씨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올해 3월에 입학한 고등학교 1학년 윤현주(44·여)씨는 학교에서 어린 축이다. 윤씨는 이번 대회에서 스티브 잡스의 스탠퍼드대 연설문을 발표했다. 윤씨는 “‘더 이상 남의 삶을 사느라 내 삶을 낭비하지 말라’는 구절이 우리 학교의 모토를 잘 보여주는 것 같아 이 연설문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이어 “집이 경기도 성남이라 통학에만 2시간이 걸리고 수업을 마친 뒤에 일까지 하고 있어 피곤하지만 삶을 치열하게 살 수 있어 행복하다”고 말했다. 특히 “수능을 앞둔 고3 아들에게 엄마도 간절히 공부하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 기쁘다”고 말했다.
일성여중고에 만학도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학교에는 17살 중국동포 학생도 있다. 모델이 꿈이라는 하련(17)양은 지난해 11월 첫눈 오는 날 한국에 입국했다. 하양이 한국 학교에서 적응하지 못할까봐 걱정한 하양의 이모는 그를 모교인 일성여고에 입학시켰다.
하양은 “방과후 밥을 사주겠다는 이모들 때문에 약속이 꽉 차 있다”며 “이모들이 친딸처럼 챙겨줘 한국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번 대회에서 ‘겨울왕국’ 엘사 역을 맡은 하양은 “연극 준비 때문에 시험을 잘 못 봤지만 이모들과 함께하는 연습이 즐거웠다”며 웃었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 사진=곽경근 선임기자
만학도의 열정… 영어연극으로 꽃피다
입력 2017-10-31 0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