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골드만삭스?… ‘초대형 IB’ 여전히 가물가물

입력 2017-10-30 05:01

내달 증선위 회의 상정도 안해
금투업계 “1년 준비했는데…
前정권 꼬리표 탓” 속태워

은행 견제·여야 우려에 막혀


‘한국판 골드만삭스’를 만들겠다며 시작한 초대형 투자은행(IB) 사업이 한 달째 제자리걸음이다. 이르면 이달에 출범 예정이었지만,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다. 은행권의 견제, 정치권의 우려로 언제 인가를 받을지 알 수 없게 됐다. 1년 이상 준비해 온 금융투자업계는 속만 태우고 있다.

29일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초대형 IB의 신규 지정과 발행어음 업무 인가’ 관련 안건은 다음 달 1일 열리는 증권선물위원회 정례회의에 상정되지 않는다. 초대형 IB의 신규 지정이 이뤄지려면 증선위 정례회의를 거쳐 금융위 최종인가를 받아야 한다. 금융투자업계는 올해 안에 이런 절차가 마무리될지도 불투명하다고 본다.

정부는 지난해 8월부터 초대형 IB 육성사업을 추진해 왔다. 국내 금융투자회사들이 성장 단계에 아직 진입하지 못한 기업에 모험자금을 조달하는 기능을 강화해 진정한 IB로 거듭나자는 취지였다. 지난 7월 자기자본 4조원 이상인 증권사 5곳(미래에셋대우, 한국투자증권, 삼성증권, NH투자증권, KB증권)이 금융위에 초대형 IB 지정 등을 신청했다. 초대형 IB 인가를 받으면 만기 1년 이내 어음을 자기자본의 200% 범위 내에서 발행할 수 있다. 대규모 자금을 조달해 기업에 대출해 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정치권과 은행권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불거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지난 16일 금융위 국정감사에서 정태옥 자유한국당 의원은 초대형 IB에만 원금보장 상품인 종합투자계좌 업무를 허용하면 자금이 한 곳에 쏠릴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초대형 IB 인가 심사 시 증권사 대주주의 적격성뿐 아니라 건전성도 함께 보겠다”며 인가 기준 강화를 암시하기도 했다. 하영구 은행연합회장은 “금융투자회사에 과도한 혜택이 돌아간다. 1997년 외환위기 단초를 부른 전철을 밟을 수 있다”고 비판했다.

금융투자업계는 속앓이를 하는 중이다. 최근 황영기 금투협회장이 초대형 IB 인가 연기에 대해 “지금의 반대는 ‘숙의 민주주의’의 한 절차로서 나중에 있을 문제를 미리 점검하는 차원일 뿐”이라고 업계를 달랬지만, 효과는 미미하다. 정부의 인가를 기다리는 한 증권사 관계자는 “이전 정권의 정책이라는 낙인이 찍혀 정부, 정치권에서 막고 있는 것 아니냐”며 “초대형 IB 인가를 위해 1년 이상 준비해왔는데 답답하다”고 토로했다.

전문가들은 초대형 IB의 필요성에 공감한다. 다만 ‘모험자본 투자’라는 사업 취지에 맞도록 초대형 IB에 의무를 부과해야 한다고 본다. 김영도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초대형 IB에 사업 초기기업을 지원하도록 의무를 부과해야 한다”며 “초대형 IB의 자회사 형태로 창업 초기 기업에 투자하는 캐피털 등을 설립하도록 하는 것이 하나의 방안”이라고 말했다.

글=안규영 기자 kyu@kmib.co.kr, 그래픽=이석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