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나사로] 지켜야 할 천사의 날개

입력 2017-10-28 00:00 수정 2017-10-28 00:05

얼마 전 한 독자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독자는 “평소 국민일보를 통해 장애를 가진 이웃에 대한 소식을 접하면 적더라도 후원금을 보내왔다”면서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최근 ‘어금니 아빠’ 사건을 접하고 나서 그동안 도움의 손길을 전하고자 했던 순수한 마음이 퇴색하거나 악용될 수 있겠다 싶더라는 것이다. 모금을 주관하는 비영리단체로부터 투명한 후원금 집행 절차를 들을 수 있도록 안내한 뒤 전화를 끊었지만, 마지막까지 의심이 걷히지 않은 듯한 독자의 목소리가 잊혀지지 않았다.

실명이 공개된 이영학씨는 ‘거대 백악종’이란 희귀병을 앓던 장애인이었다. 12년 전 한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어금니가 하나밖에 남지 않아 어눌한 발음으로 같은 병을 앓는 딸과의 삶을 소개했다. 그러면서 ‘어금니 아빠’로 불리기 시작했다. 딸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날아가 후원을 요청하고, 지극정성으로 딸을 보살피는 모습에 많은 이가 관심과 지원을 보냈다. 하지만 천사처럼 보이던 이씨의 실체는 ‘세상에 이런 악마가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이씨 범죄 행각이 드러날수록 대중이 쏟아내는 비난의 수위도 높아졌다. 그의 이름 앞엔 ‘두 얼굴의 사이코패스’ ‘모범시민 가면을 쓴 흉악범’ ‘후원금 사냥꾼’ 등의 수식어가 붙었다. 하지만 이 사건이 단순히 사이코패스가 잔인하고 흉악한 범죄를 저질러 사람들을 경악케 한 것에 그치지 않는 이유는 그가 우리 사회의 ‘선한 의지’ ‘섬김과 나눔’을 악용했기 때문이다.

장애를 입은 모습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호소하고 딸의 치료비 명목으로 받은 후원금을 그는 고스란히 향락을 누리는 데 사용했다. 사실을 확인한 후원자들이 느끼는 배신감과 충격은 실로 엄청났다. 이씨에게 후원금을 보낸 사람이 아니더라도 다른 기관이나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기부하던 사람들의 마음엔 전에 없던 ‘불신’이 싹트기 시작했다. 한 비영리단체 관계자는 “어금니 아빠 사건이 알려진 뒤 직원들도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며 “아직 눈에 띄게 후원 중단 현상이 나타나진 않지만 기부문화가 위축되거나 기부 포비아(phobia)가 확산되지 않을까 우려가 커진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심리적 허탈감과 충격을 제대로 표출하지도 못한 채 속앓이만 하는 이들도 있다. 바로 장애인들이다. 복지기관으로부터 정기후원을 받고 있는 한 지체장애인은 “사건 이후 거리에 나설 때마다 예전과 별다를 것 없는 사람들의 시선이 왠지 불편하게 느껴진다”며 “한 번은 카페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이씨가 장애수당을 얼마 받았다’는 얘길 주고받으며 힐난하는데 나를 향해 쏟아내는 말 같아 얼른 자릴 떴다”고 토로했다.

또 다른 비영리단체 관계자는 “보완 차원에서 좀 더 꼼꼼하게 후원 대상자를 검증하는 시스템을 마련하고 있다”면서도 “불필요한 의심이 늘어나고 기부문화의 순수성이 훼손되는 것은 경계해야 할 일”이라고 덧붙였다. 언론의 자성도 덮고 갈 문제가 아니다. ‘어금니 아빠’는 미디어가 만들어 준 이미지다. 후원 대상자와 주변 인물, 환경에 대한 심도 있는 고찰 없이 왜곡된 사실만 전달하는 것은 후원자들의 신뢰를 볼모로 잘못 짜깁기된 한 편의 신파극을 퍼 나르는 것에 불과하다.

소수의 악인으로 인해 다수의 천사 같은 이들의 날개가 꺾이는 일은 없어야 한다.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이야기는 거짓을 사실로 둔갑시킬 수 있고 사실로 둔갑한 거짓은 악인의 손에 들려 천사를 위협하는 무기가 될 수 있다.

“너는 거짓된 풍설을 퍼뜨리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위증하는 증인이 되지 말며.”(출 23:1)

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