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후환 두려워… 폭행·폭언에도 입닫은 전공의들

입력 2017-10-25 18:18 수정 2017-10-25 18:42


하얀 가운 안엔 얼룩덜룩 피멍… 왜 참아야만 했나
문제 생겨도 행정처분 약해 11명 폭행 부산대병원 교수
징계는 정직 3개월에 그쳐
“가운 벗을 각오 아니면
문제 삼기 어려운 게 현실
정부 지도 감독 강화 절실”

서울의 한 대학병원 전공의 A씨는 지난 6월 대한전공의협회(대전협)에 도움을 요청하는 메일을 보냈다. 학교 교수 한 명의 폭언에 따른 고통을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수술 준비를 잘 못했다는 이유로 “너는 개다. 너 같은 XX가 왜 사는지 모르겠다” “너 같은 XX는 개같이 모욕을 줘야 한다” 등의 폭언을 들었다는 사연이 담겼다. 교수가 자신의 논문자료 영어 번역을 전공의에게 맡기는 등 개인비서처럼 부렸다는 내용도 있었다.

대전협은 규정상 피해자가 직접 보건복지부에 제보하거나 법적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러자 A씨는 제보를 포기했다. 대전협 관계자는 “협회 차원에서 대응하지 못하면 본인이 더 큰 피해를 볼까 우려한 듯 싶다”고 설명했다.

교수들로부터 폭행·폭언을 들으며 인권유린을 당하는 전공의들이 2차 피해를 우려해 입을 다무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해당 교수에 대한 징계가 솜방망이에 그치는 반면 피해자는 ‘배신자’로 낙인 찍혀 제대로 된 의사생활을 할 수 없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25일 대전협에 따르면 지난해 9월부터 올해 8월까지 교수·전공의 등의 폭행·폭언 피해 접수 민원은 21건에 달한다. 하지만 보건당국에 제보로 이어진 건 4건에 불과했다. 피해사례가 중복된 병원을 제외하면 10여개 병원에서 전공의 폭언·폭행 사건이 이뤄지고 있지만 드러나지 않은 셈이다.

대전협 관계자는 “(폭행·폭언 등에 관한 내용을 들어보면) 전공의들이 버틸 수 있는 한계까지 버티다 더 견디지 못하는 경우만 연락해 온다”며 “현장에서 실제로 폭행·폭언을 당하는 사례는 더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규정상 피해자 본인이 직접 복지부에 제보하거나 소송을 제기해야 한다는 조언을 하면 제보를 포기하는 사례가 대부분”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부산대병원 교수가 2년간 전공의들을 온몸에 피멍이 들 정도로 폭행한 사실 외에도 드러나지 않은 전공의들의 피해사례가 많을 것이라는 뜻이다.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산부인과의 성추행 사건 역시 언론을 통해 소식이 알려진 뒤 복지부 조사가 시작됐다.

전공의들은 의사 직업 특성상 내부고발자 신분이 철저히 보호되기 힘들다고 토로한다. 교수에게 폭행을 당했다는 한 전공의는 “병원에 알리더라도 적극적으로 조사하지 않거나 전공의에게 합의를 종용하는 경우가 많다”며 “의사 가운을 벗을 각오를 하지 않고서는 문제 삼기 힘들다”고 말했다.

위반사항에 대한 행정처분 역시 약하다. 복지부는 병원에 폭행 가해자에 대한 해임 등 처분을 요구할 수 없고, 벌칙도 전공의법에 따른 정원 감축 정도에 그친다. 병원장(수련병원 등의 장)에게 부과하는 과태료 최고액도 500만원에 불과하다. 전공의 정원 감축 조치가 내려지면 후임 전공의가 들어오지 않아 업무량만 늘어난다.

가해자에 대한 병원 차원의 처벌도 미비하다. 2014년부터 2년간 전공의 11명을 폭행한 것으로 알려진 부산대병원 교수는 ‘습관적인 두부 구타로 고막 파열’ ‘수술기구를 이용한 구타’ ‘정강이 20차례 구타’ 등을 했지만 징계는 정직 3개월에 그쳤다.

이승우 대전협 부회장은 “폭행 사건이 일어나도 지도교수와 피해 전공의가 함께 근무하는 등 제보자 보호 체계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다”며 “전공의에 대한 교수의 가혹행위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만큼 복지부가 전수조사를 하고 비실명 내지 간접 제보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허경구 기자 nine@kmib.co.kr, 그래픽=전진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