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공정위,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구제기회 2번 놓쳤다

입력 2017-10-26 05:00
송기호 변호사(왼쪽 두 번째)와 가습기살균제참사전국네트워크 관계자들이 지난달 서울 종로구 환경보건시민센터에서 공정거래위원회의 ‘가습기메이트 인체무해’ 부당표시광고 조사 중단을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다. 뉴시스
지난해 12월 21일 공정거래위원회는 전원위원회를 열고 시장지배적 지위 남용 혐의로 퀄컴에 사상 최대 과징금인 1조300억원을 부과했다. 공정위는 다국적 기업의 불공정행위에 철퇴를 내렸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하지만 같은 날 가습기 살균제 ‘면죄부’ 판정을 재조사해야 한다는 내부 보고서는 전원위원회에서 묵살됐다. 공정위가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의 눈물을 닦아 줄 기회를 두 번이나 놓친 셈이다.

25일 전해철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열람한 공정위의 ‘가습기 살균제 사건 재심의 검토보고서(심판관리관실·2016년 11월)’는 지난해 8월 ‘가습기 메이트’ 제조·판매사에 내린 심의절차종료 결정이 잘못됐고, 이를 바로잡기 위한 재조사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 사건을 맡았던 소위원회는 당초 ‘협의결렬에 따른 전원위원회 회부’ 결정을 ‘윗선 외압’에 따라 사실상 무혐의인 심의절차종료 결정으로 바꿨다.

공정위가 피해자 구제와 진실을 밝히려는 일말의 의지를 갖고 재심의 검토보고서를 채택했다면, 재조사를 거쳐 SK케미칼과 애경을 검찰에 고발할 수 있었다. 소위원회의 실체·절차적 하자 결정을 바로잡을 기회가 있었던 것이다.

특히 전원위원회에서 재심의를 검토한 지난해 12월에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측은 공정위의 심의절차종료 결정에 대해 헌법소원을 제기한 상태였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 사회 이슈가 되는 걸 막으려했던 박근혜정부는 탄핵 위기로 내몰리고 있었다. 앞서 지난해 4월 이병기 청와대 비서실장은 ‘이 사건이 사회적으로 쟁점화 되지 않게 하라’는 내용의 공문을 각 정부부처에 전달했었다.

공정위는 재조사에 착수할 기회를 날려버린 것은 물론 이런 사실을 지금까지 꽁꽁 감췄다. 재심의 검토보고서를 보면 공정위의 또 다른 거짓말이 드러난다. 지난해 8월 공정위 소위원회는 심의 과정에서 이 사건의 공소시효는 물론 과징금 부과를 위한 처분시효가 8월 31일부로 만료되기 때문에 빠른 결정이 필요하다며 비상임위원 2명을 압박했다. 이후 ‘면죄부 논란’이 커지자, 공정위는 이 사건 공소시효는 ‘2016년 8월 31일부’로 끝나 검찰 고발이 어렵지만, 처분시효는 2021년까지 연장됐다고 말을 바꿨다. 반면 재심의검토보고서는 2012년에 이 사건을 조사해 이미 한차례 무혐의를 내렸기 때문에 처분시효 연장이 법리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렵다고 분석했다.

공정위는 뒤늦게 재심의 검토보고서의 존재와 전원위원회 논의 내용을 인정했다. 공정위 신동권 사무처장은 “공식 안건은 아니었지만 전원위원회에서 재조사 필요성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면서 “심의절차종료 결정을 내린 뒤로 상황 변화가 크지 않아 재조사 착수 필요성이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고 말했다.

전해철 의원은 “2016년 국정감사 이후 재조사가 필요하다는 심판관리관실 의견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아 가습기 살균제 기업에 대한 적법한 조치가 더욱 어려워졌다”며 “당시 결정에 대한 책임을 명확히 하고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말했다.

세종=이성규 기자 zhibago@kmib.co.kr, 그래픽=안지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