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가습기 살균제 재조사 기회, 공정위가 스스로 무산시켜

입력 2017-10-25 18:31 수정 2017-10-25 22:11

작년 11월 절차종료 문제 제기
업체 고발 가능 내용 담고도
일부 상임위원 반대로 포기
피해자측 “공소시효 연장 가능”

공정거래위원회가 지난해 말 가습기 살균제 사건 ‘면죄부’ 판정을 바로잡을 기회를 스스로 무산시킨 것으로 확인됐다. 새 정부 들어서도 공정위는 이 사건 재조사를 차일피일 미루다 지난달에야 늑장 조사에 착수했다.

25일 전해철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따르면 공정위 심판관리관실은 2016년 11월 ‘가습기살균제 사건 재심의 검토 보고서’를 작성했다. 보고서는 같은 해 8월 공정위 소위원회가 내린 ‘심의절차 종료’ 결정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현 시점에라도 재조사에 착수하면 해당 업체에 대한 고발과 제재가 가능하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앞서 공정위는 ‘가습기메이트’를 제조·판매한 SK케미칼과 애경의 표시광고법 위반 사건에 대해 사실상 무혐의인 심의절차 종료를 결정했다. 공정위는 당시 8월 31일부로 위법행위로부터 5년까지 가능한 공소시효가 지나 검찰 고발이 불가능해졌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불과 3개월 후 작성된 공정위 재심의 검토 보고서는 이 같은 내용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 보고서는 환경부가 인정한 가습기메이트 사용 피해자 중 2011년 10월 7일 출생한 아동이 존재하기 때문에 2012년 이후에도 가습기메이트가 판매·사용됐다는 추론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현 시점에서 재조사에 착수해 제조·판매사가 주장하는 가습기메이트 판매 중지일인 2011년 8월 31일 이후 이 제품이 판매됐다는 증거를 찾는다면 공소시효가 2017년 이후까지 늦춰질 수 있다고 명시했다.

당시 정채찬 공정위원장은 이 보고를 받고 같은 해 12월 전원위원회에서 가습기 살균제 사건 재심의 여부를 논의했다. 하지만 상임위원 3명 등 위원 의견을 수렴한 결과 재심의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당시 재심의 반대 의사를 표명한 위원은 3개월 전 이 사건 주심이었던 김성하 상임위원인 것으로 알려졌다. 재심의 검토 보고서의 존재와 공정위가 이를 스스로 무산시킨 사실이 밝혀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공정위 심의절차 종료 결정에 대한 헌법소원을 청구한 피해자 측은 지난 11일 재심의 검토 보고서와 비슷한 취지의 심판청구 보충서를 헌법재판소에 제출했다. 피해자 측은 “2011년 9월 24일 애경의 광고 행위가 발견됐으며, 이어진 일련의 광고 행위를 포괄적으로 봐야 하기 때문에 공소시효가 연장될 수 있다”고 밝혔다.

지난 8월초 문재인 대통령이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에게 사과한 이후에도 공정위는 즉각 재조사에 착수하지 않다가 한 달이 지난 9월 중순에야 재조사에 착수했다. 피해자 측 대리인인 송기호 변호사는 “공정위가 지난해 말 재심의 검토보고서에 따라 재조사에 착수했다면 이미 결론이 났을 것”이라며 “지금이라도 재조사에 속도를 내야 한다”고 말했다.

세종=이성규 기자 zhibag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