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잘 사는 나라’로 분류하는 이유 중 하나로 정부 빚이 적다는 점이 꼽힌다. 2015년 기준으로 40% 초반인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7번째로 낮다. 이 때문에 북한 리스크에도 불구하고 세계 3대 신용평가사는 한국에 후한 신용등급을 매긴다. 하지만 소수를 제외한 국민 대다수에게 잘 사는 나라는 겉모습뿐이다. 1400조원에 육박하는 가계부채가 상징적이다. 정부는 부자이지만, 국민은 가난하다.
이웃나라 일본은 전혀 다른 모습이다. 일본은 1999년 이후 OECD 국가 중 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 1위를 놓친 적이 없다. 다만 국민의 지갑 사정은 한국과 사뭇 다르다. 세계 최고 수준의 국가부채보다 일본 국민이 보유한 순자산의 총량이 더 많다. 가계의 금융자산만 보면 미국 스위스에 이어 세계 3위다. 정부는 가난해도, 국민은 부자인 셈이다.
정부가 부자라고 안심할 상황도 아니다. 정부의 복지 지출은 계속 늘고 있다. 국가부채에 포함되지 않는 ‘숨은 부채’도 산재해 있다. 자원외교로 빚더미에 앉은 한국광물자원공사와 같은 비금융 공기업의 부채를 합하면 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이 60% 이상으로 뛰어오른다. 당장은 몰라도 중장기적으로 정부와 국민 모두 가난해질 위험이 존재하는 것이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김광림 자유한국당 의원이 기획재정부로부터 받아 24일 공개한 ‘GDP 대비 정부부채’ 자료에 따라면 한국의 GDP 대비 부채비율은 2015년 기준으로 43.2%다. 2011년 34.5%에서 연평균 2.2% 정도 증가했다. 늘어나는 추세지만 건전한 수준이다. 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이 한국보다 낮은 OECD 회원국은 에스토니아 칠레 터키 룩셈부르크 노르웨이 라트비아 정도다. 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이 100%를 넘어선 미국이나 캐나다 프랑스보다도 한국이 재정을 사용할 여력 면에서 풍족한 것이다.
반면 국민의 지갑 사정은 한숨이 나온다. OECD에 따르면 2015년 기준으로 한국의 처분가능소득 대비 가계부채 비율이 170.0%에 이른다. 처분가능소득은 세금이나 연금 등을 제외한 소득이다.
일본의 상황은 180도 다르다. 일본의 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은 219.3%나 된다. 한국의 5배 이상이다. 규모는 1209조엔(약 1경2007조원)에 달한다.
그런데 국민으로 비교영역을 확대하면 평가가 달라진다. 일본 국민이 보유한 가계의 순자산은 국가부채보다 더 많다. 일본의 가계 순자산은 1346조엔(약 1경3368조원, 2015년 기준)이나 된다. 가구별로 보유한 금융자산도 세계에서 손꼽힐 정도다. OECD가 지난해 발간한 ‘삶의 질’ 보고서를 보면 2013년 일본의 가구당 금융자산은 9만801달러였다. 미국(16만1647달러)과 스위스(11만6083달러)에 이어 세 번째로 높았다.
물론 일본 국민도 부채는 있다. 처분가능소득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2015년에 135.1%를 기록했다. 버는 것보다 빚이 많은 셈이다. 그렇지만 보유자산이 많다는 점에서 한국과 다르다.
박상준 와세다대 경제학과 교수는 저서 ‘불황탈출’에서 한국의 견실한 재정상황을 높이 평가한다. 박 교수는 “당분간은 확장적 재정정책을 운용할 여지가 있다”고 분석했다. 주목할 부분은 ‘당분간’이라는 대목이다. 여기에는 중장기적으로 복지 지출 등이 늘어나는 것에 대비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한국 정부가 복지에 쓰는 비용은 전체 예산의 10% 초반인 반면 일본은 2015년 기준 재정의 32%를 고령자나 취약계층에 쓰고 있다. 한국도 초고령사회에 진입하면 복지 예산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국민에 이어 국가까지 가난해지지 않으려면 비금융 공기업의 부채도 고려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국가부채는 ‘일반정부 부채(D2)’를 말한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비영리 공공기관의 부채가 포함된다. 비금융 공기업을 제외하는 게 OECD 기준이다. 다만 일각에선 이를 포함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4대강 사업으로 빚을 진 한국수자원공사의 경우 정부가 부채의 이자 일부를 대신 갚아주기도 했다. 이를 합한 ‘공공부문 부채(D3)’는 2015년 기준으로 GDP 대비 비율이 64.2%에 달했다.
세종=신준섭 기자 sman321@kmib.co.kr, 그래픽=전진이 기자
韓 ‘부자 정부·가난한 국민’ vs 日 ‘가난한 정부·부자 국민’… 180도 다른 경제
입력 2017-10-25 0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