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검찰에 수사 지침 하달… ‘보도 통제’ 언론 플레이도

입력 2017-10-23 22:09 수정 2017-10-23 23:46

국가정보원이 2009년 ‘박연차 게이트’와 관련한 노무현 전 대통령 검찰 수사에 집요하게 개입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검찰에 수사지침을 하달하는가 하면 보도 내용 통제를 시도하는 등 적극적인 언론플레이를 벌였다.

국정원 개혁발전위가 23일 발표한 적폐청산 태스크포스(TF) 조사 결과에 따르면 원세훈 전 국정원장은 2009년 4월 17일과 20일 내부 회의에서 “동정여론이 유발되지 않도록 온·오프라인에 노 전 대통령의 이중적 행태 및 성역 없는 수사의 당위성을 부각시키겠다”는 보고를 받고 이를 승인했다. 원 전 원장은 또 검찰 수사가 본격화되자 국정 부담을 이유로 ‘불구속 수사가 맞다’는 의견을 내부 회의에서 수차례 표출했다.

원 전 원장 측근이었던 국정원 간부는 같은 달 21일 이인규 당시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을 만나 이런 의중을 전달했다. 그러면서 ‘명품시계 수수 건 등을 언론에 흘려 망신 주는 용도로 쓰라’고 조언했다. 해당 내용은 곧이어 KBS 등에 보도됐다. 이 전 중수부장은 최근 “지금 밝히면 다칠 사람들이 많다”면서 구체적인 진술을 거부했다.

국정원은 일부 언론사에 노 전 대통령 수사상황을 적극 보도해줄 것을 요청하고 국정원 수사 개입설에 대한 보도 자제를 요청하는 등 언론플레이에도 나섰다. 특히 당시 국정원이 KBS 보도국장이던 고대영 현 KBS 사장을 상대로 보도 협조 명목으로 현금 200만원을 집행한 예산신청서·자금결산서 및 진술도 확보됐다. 개혁위는 “KBS 보도국장의 현금수수는 뇌물죄에 해당될 여지가 있어 검찰에 수사의뢰가 필요하다”고 국정원에 권고했다. 다만 국정원이 검찰에 불구속 의견을 전달한 수사관여 행위는 국가정보원법상 직권남용에 해당될 소지가 있으나 공소시효가 지난 것으로 확인됐다.

개혁위는 또 국정원이 2009년 청와대 요청에 따라 보수단체 ‘화이트리스트’를 작성하고 이들에게 공기업·대기업 자금 지원을 주선하는 등 손수 육성한 사실도 확인했다고 밝혔다. 국정원은 ‘좌파 국정방해와 종북 책동 대항마로서 보수단체 강화’를 명목으로 보수단체와 기업을 매칭해 활동자금 지원체계를 구축했다. 이에 따라 2009년 5개 공기업 매칭 지원을 시작으로 2010년에는 18개 보수단체를 17대 대기업·공기업 등과 32억원을 지원토록 했다. 국정원은 보수단체를 활동 실적과 조직 규모, 인지도 등에 따라 S등급부터 D등급까지 5개 범주로 분류했다. 자유총연맹, 새마을운동협의회, 미디어워치, 뉴라이트전국연합 등 유명 보수단체가 총망라됐다. 이들 단체에 출연한 기업 명단에는 전경련과 삼성 현대차 LG 등 대기업, LH공사 수자원공사 한수원 등 주요 공기업이 두루 포함됐다.

국정원은 2011년에는 7개 인터넷 매체를 포함해 43개 보수단체로 지원 대상을 확대했다. 이들을 전년도 출연 기업 일부와 5대 시중은행을 포함한 18개 기업에 매칭시켜 약 36억원을 지원했다. 2012년에도 국정원은 41개 보수단체와 16개 인터넷 매체 대상으로 50여억원 매칭을 지속 추진했다. 하지만 그해 하반기 사이버전단 댓글사건 논란이 불거지자 갑작스레 사업을 종료해 지원 내역에 대한 결산도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개혁위는 “국정원의 해당 사업이 국가정보원법상 정치관여와 직권남용 금지 의무를 위반한 것”이라고 판단해 원 전 원장 등에 대해 검찰에 수사의뢰했다고 밝혔다.

정건희 기자 moderat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