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정부가 발굴하고 실험한 의제들이 전국으로 확산되고 국가 정책으로 채택되는 ‘지역발 의제’ 전성시대다. 이제 정책은 지방정부가 선도한다는 말이 나온다. 중앙정부가 밑그림을 그리고 지방자치단체들이 이를 집행만 하던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지방정치의 중요성이 커지고 지방정부의 할 일도 늘어나고 있지만 권한은 그대로다. 지방자치단체가 일을 하기 위해서는 입법권, 조직권, 재정권이 필수적인데 3가지 모두 20여년 전 만들어진 지방자치법 등에 의해 족쇄가 채워져 있다. 발목을 잡아놓고 달리라고 하는 격이다.
법 제정 전까진 손 놓고 있으라?
서울시 청년수당 문제는 지방정부가 전국 최초의 사업을 해나가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알려준다. 서울시는 지난해 저소득·장기 미취업 청년들에게 월 50만원을 활동지원금 명목으로 최대 6개월간 지원하는 청년수당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서울시 청년수당은 한 달 지급되고 중단됐다.
당시 박근혜정부는 청년수당이 청년들의 도덕적 해이를 초래하고 구직활동과 무관한 항목에 사용할 수 있다는 이유를 들며 서울시에 사업 승인을 해주지 않았다. 서울시가 청년수당 지급을 강행하자 보건복지부는 사업에 대한 직권취소 통보를 했다. 서울시는 사업을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사업은 문재인정부 출범 후에야 다시 시작될 수 있었다.
정희윤 서울연구원 상생발전분권연구센터장은 “최초의 사업이란 건 기존에 없는 걸 하는 것인데, 지방정부는 상위법이 없으면 사업을 시작할 수 없게 막아놓았다”면서 “법이 정해놓은 틀 안에서만 사업을 하라고 하면 어떻게 새로운 일을 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이런 어려움은 전국 최초로 제정된 성동구의 ‘젠트리피케이션 조례’에서도 드러난다. 이 조례는 구청장이 지정한 지속가능발전구역 내에서 대기업이나 프랜차이즈 업소를 입점하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젠트리를 막기 위해서는 입점 제한이 필요하다는 성동구의 판단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이 조례는 주민의 권리 제한에 대한 조례 제정은 상위법의 위임이 있어야 한다는 지방자치법 제22조 단서 조항과 상충될 가능성이 있다. 젠트리 방지법이 제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조례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성동구의 젠트리 조례는 위법성 논란을 겪고 있다.
국회의원들이 법을 만들기 전까지 지방정부는 손을 놓고 있으란 얘기나 마찬가지다. 지방정부가 문제를 발견해 해결하려고 해도 상위법이 없어서 하지 못하는 상황을 막기 위해서는 지방정부의 입법권이 강화돼야 한다. 지역 특성에 맞는 조례를 만들 수 있도록 조례 제정 범위를 넓혀줘야 한다는 것이다.
핵심은 지방자치법 제22조의 개정이다. 지자체들은 조례 제정 범위를 규정한 22조의 ‘법령의 범위 안에서’라는 문구를 ‘법령에 위반되지 않는 한도에서’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지자체 사업이 실효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조례에서 벌칙을 제정할 수 있어야 한다며 제22조 단서조항 ‘다만, 주민의 권리 제한 또는 의무부과에 관한 사항이나 벌칙을 정할 때에는 법률의 위임이 있어야 한다’를 삭제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부시장은 3명까지만” 지나친 규제
지방정부는 조직 구성과 운영에서도 세세하게 규제를 받고 있다.
‘도시외교’의 중요성에 주목해온 박원순 서울시장은 외교부시장 자리를 두고 싶어 한다. 서울시의 관광사업과 문화사업을 총괄할 문화부시장도 꼭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렇지만 법을 바꾸지 않는 이상 서울시 부시장 숫자를 늘릴 수가 없다. 지방자치법 제110조에 따르면 특별시의 부시장 정수는 3명을 넘지 않는 범위에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도록 돼 있다.
서울시의 부시장 숫자는 프랑스 파리시 7명, 중국 상하이시 8명과 비교해도 한참 적다. 파리시의 경우, 시장이 중점을 두는 사업에 부시장을 임명한다. 파리시의 공영 자전거 시스템인 ‘벨리브’를 도입한 베르트랑 들라노에 전 파리시장은 자전거담당 부시장도 두었다.
부시장 숫자뿐만 아니라 서울시청의 실·국·본부 숫자도 지방자치법과 대통령령에 의해 17개로 제한돼 있다. 단체장이 주민 요구나 자신의 철학에 따라 조직을 탄력적으로 운영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서울시는 도시재생 사업을 추진하면서 ‘도시재생본부’를 출범시켰고 ‘동물보호과’ ‘인생이모작지원과’ 등 신흥 의제들에 대응할 부서를 신설했다. 또 박 시장의 철학과 방향을 반영해 ‘해외도시협력담당관’ ‘인권담당관’ 등을 새로 설치했다.
서울시 조직담당관실 관계자는 “시장이 새로 와서 본부를 하나 신설하고 싶으면 기존 본부를 없애거나 통폐합해야 한다”면서 “시가 대응해야 할 과제나 업무도 계속 생겨나는데 조직과 정원이 묶여 있어 운신의 폭이 넓지 않다”고 말했다.
박 시장은 지난 17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의 서울시 국정감사에서 시청 7급 공무원 투신자살에 대한 질의를 받고 “새로운 행정 서비스 수요에 대처하고 직원들의 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공무원을 늘리는 수밖에 없다”며 “서울시가 자율적으로 조직과 정원을 운용할 수 있도록 규제를 해소해 주면 문제 해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호소했다.
중앙정부에 의존하는 지방재정
지방정부가 일을 새로 하고 싶어도 재정을 확보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서울시내 구청장이 임기 중에 300억원 가량의 예산이 투입되는 구립도서관 하나 지으려고 해도 못 하는 게 현실이다. 서울시 각 자치구의 1년 예산이 4000억∼5000억원이나 된다고 하지만 그중 절반가량은 사회복지비로 지출되고, 나머지도 공무원 월급 등 대부분 용처가 확정된 예산이다. 구청장이 자신의 뜻을 담아 집행할 수 있는 돈은 한 해 100억원도 채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구청에 예산편성권이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말도 나온다.
지방정부에 대한 요구는 늘어나는데 재정자립도는 악화되고 있다. 우리나라 지자체의 평균 재정자립도는 2004년 약 57%였는데, 10년 뒤 이 수치는 약 45%로 떨어졌다. 재정자립도는 각 지자체가 한 해 동안 사용하는 돈을 어느 정도나 스스로가 충당하고 있는지 의미하는 지표다. 재정자립도가 낮다는 건 중앙정부로부터 받는 돈이 지방정부가 걷는 돈보다 많다는 의미다.
중앙정부에 간섭받지 않고 스스로의 결정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재원을 나타내는 지표로 ‘재정자주도’란 게 있다. 2015년의 경우, 전국 지자체의 재정자립도 평균은 45% 정도지만 재정자주도는 68%에 달했다. 이를 근거로 지자체의 예산 사용 자율권이 크게 제약되었다는 논리는 무리하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자주 재원 역시 중앙정부나 광역자치단체로부터 따와야 한다는 점에서 지자체가 상위 정부의 정책을 따라가지 않을 수 없는 구조다. 지방정부가 나름의 특성화된 정책을 펼쳐나갈 예산은 크게 부족한 실정이다.
글=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 그래픽=이석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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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7-10-24 2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