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원전 공론화… ‘갈등 조정’ 숙의민주주의 가능성 봤다
입력 2017-10-21 05:00
“신고리 재개-탈원전 권고”
현실과 이상 절묘한 절충
원전반대 진영도 ‘존중·승복’
사회적 합의 도출 선례될 듯
불통과 불신으로 막대한 갈등 비용을 치르던 한국사회가 갈등 해결의 작은 실마리를 발견했다. 신고리 원전 5, 6호기를 두고 한 달 동안 숙고한 시민참여단은 ‘건설 재개’에 손을 들어주면서도 장기적으로는 ‘탈(脫)원전’이 옳다고 권고했다.
이른바 ‘숙의(熟議·Deliberation) 민주주의’로 불리는 이번 시도가 한국사회의 갈등을 풀 하나의 해법이 될 수 있다는 기대가 조심스럽게 나온다. 김지형 공론화위원장은 20일 정부서울청사에서 대(對)정부 권고안을 공개하고 “신고리 5, 6호기 건설 중단 여부와 관련해 건설 재개 쪽을 최종 선택한 비율이 59.5%로 건설 중단(40.5%)보다 높았다”고 밝혔다. 정부의 향후 원전 정책에 대해선 ‘축소’ 의견이 53.2%로 가장 많았다. ‘유지’는 35.5%, ‘확대’는 9.7%에 그쳤다.
재개·중단 의견 간 격차는 19.0% 포인트로 오차범위(95% 신뢰수준에서 ±3.6% 포인트)를 크게 뛰어넘었다. 공론화위는 이날 대정부 권고안을 이낙연 국무총리에게 전달했다. 정부는 24일 문재인 대통령 주재 국무회의에서 신고리 원전 5, 6호기 건설 재개를 최종 확정할 예정이다.
지난 3개월간 공론조사 과정을 총지휘한 김 위원장은 “대의제 민주주의를 보완하는 민주적 의견수렴 절차로서 숙의 민주주의를 본격 추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며 “이번에 얻은 경험과 자료가 새로운 민주적 상생의 수단으로 사회 곳곳에 활용되도록 정부의 체계적인 지원을 요청한다”고 말했다.
정부는 지난 7월 신고리 원전 5, 6호기 건설을 3개월간 중단하고 재개 여부는 공론조사를 통해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신고리 5, 6호기 폐쇄는 문 대통령의 공약이었지만 지금까지 투입된 비용과 전기 수급 등 현실적 문제가 크다는 반론이 제기되자 공론조사라는 ‘우회로’를 택했다. 이후 공사 재개 측은 물론 공사 중단 측에서도 절차적 공정성과 정당성을 둘러싼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결과가 나오자 공사 재개 측과 공사 중단 측 모두 승복했다. ‘작은 대한민국’으로도 불렸던 시민참여단 471명이 한 달간 학습과 숙의를 거쳐 내놓은 결론을 존중한 것이다. 신고리 5, 6호기 백지화 전국시민행동은 “시민참여단이 보여준 진중한 토론 모습과 판단을 존중한다”고 밝혔다.
이번 방식이 다른 갈등 사례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역대 정부들은 전북 부안 방폐장 부지, 천성산 터널, 영남권 신공항 부지, 사드(THAAD) 배치 등을 둘러싸고 정부의 무능과 정치권의 타협 부재로 상당한 사회적 갈등 비용을 지불해 왔다. 때문에 갈등이 첨예한 일부 현안들은 공론조사 방식이 새로운 해법으로 제시될 수 있다는 의미다.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이번 공론조사 결과가 문재인정부 공약과는 달랐지만 사회적 갈등 해결에는 좋은 선례가 됐다”며 “이 방법을 확대 적용하는 방안을 검토해볼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공론화 시민참여단 멤버였던 송호열(58) 한국지도학회장(전 서원대 총장)도 “앞으로 사회에 새로운 이슈가 있을 때 이를 전례로 삼아 공론화가 수월하게 이뤄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다만 시민참여단의 법적·정치적 정당성에 대한 논란 등 해결해야 할 과제도 적지 않다는 반론도 나온다. 서경교 한국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과정이 급박했다. 시민참여단이 국민 전체 의견을 대표한다는 논리성과 합리성도 담보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조성은 최예슬 허경구 신재희 기자 jse130801@kmib.co.kr, 사진=윤성호 기자, 그래픽=안지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