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남한산성’이 인기를 끈 이유는 무엇일까. 잘 알다시피 영화는 1636년 병자호란을 다룬 김훈의 장편소설이 원작이다. 당시 남한산성에 고립된 조선의 처지가 대한민국의 현실과 다르지 않다. 북한 핵·미사일과 사드 등 엄중한 외교·안보적 현안 앞에서 미국과 중국 사이에 둘러싸인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2017년 10월이 381년 전의 상황과 흡사하다. 서글픈 역사가 한낱 과거의 이야기로만 여겨지지 않는다. 먹먹하고 무거웠던 영화가 흥행으로 이어진 이유일 게다.
한양과 남한산성을 이어주던 나루였던 삼전도(三田渡)에서의 굴욕은 보약이 됐을까. 클클하게도 그렇지 못했다. 인조는 13년을 더 집권했지만 달라진 것이 없었다.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당했지만 국력을 키우기보다는 자리보전에 급급했다. 명나라의 국운이 기울고 청나라가 세력을 장악했지만 인조는 주변정세나 국가혁신은 안중에 없었다. 오로지 고답적인 성리학에 몰두하며 명분과 의리에 더욱 집착했다. 나라를 개혁해야 하는 중차대한 시기였지만 정당이나 이념이 다르면 사문난적으로 매도해 가차 없이 죽였다. 언제나 그렇지만 죽어나는 이들은 이름 없는 민초들이었다.
그럼 남한산성에서 맞섰던 두 주인공 최명길과 김상헌은 어떤 길을 걸었을까. 화의를 맺어야 한다는 주화파 최명길과 계속 싸워야 한다는 척화파 김상헌은 전쟁이 끝난 후 청의 수도 심양에서 다시 만났다. 머나먼 이국 땅 감옥에서 함께 갇히는 운명을 맞은 것이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김상헌은 청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 1640년에 심양으로 끌려가 5년간 감옥에서 생활했고, 최명길은 명과 비밀 외교를 했다는 이유로 1642년 압송돼 심양에서 옥살이를 했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시를 주고받으며 극적으로 화해를 했다. 최명길을 국가에 치욕을 안긴 만고의 역적이라고 했던 김상헌이 “조용히 두 사람의 생각을 찾아보니 문득 백년의 의심이 풀리는구려”라는 시를 먼저 보냈다. 이에 최명길이 “고요한 곳에서 여러 움직임을 관찰하면 참되게 합의점을 찾을 수 있네. 끓는 물과 얼음은 모두 같은 물이고 털옷이나 삼베옷도 같은 옷이라네. 혹여 때에 따라 달라질지라도, 어찌 마음이 진리와 어긋나리오”라고 화답했다. 정치 노선은 극명하게 갈렸지만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국가를 위해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던 점을 서로 인정한 것이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을 내밀어 상대를 껴안는 성숙된 모습을 보였다. 이를 두고 김훈 작가는 두 사람은 적대하는 양 극단이 아니며 결국 최명길의 말을 따라가지만 김상헌이라는 사람이 없었다면 그런 구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했다. 상호 보완적 관계이지 적대 관계가 아니라는 얘기다.
실리를 추구한 최명길과 명분을 중시한 김상헌의 대립은 300여년이 흐른 현재도 진행형이다. 북한 핵에 맞서 한·미 공조를 더욱 견고하게 해야 한다는 동맹파와 운전자론을 외치는 자주파의 대립이기도 하고 사사건건 맞서고 있는 진보와 보수, 적폐 청산과 정치 보복의 대립일 수도 있다. 영화 ‘남한산성’을 놓고도 엇갈린 감상평이 나온다. 보수 세력은 역사적 배경을 북핵 위기와 연결하면서 ‘군주의 무능’을 부각시키지만 진보 측은 당시의 시대상을 작금의 위기에 빗대는 것은 억지라며 선을 긋는다. 이념에 얽매여 보고 싶은 것만 보는 협소함이 엿보인다.
성 안에선 첨예하게 대립했지만 성 밖에선 서로를 인정했던 두 거목의 포용과 너그러움이 그래서 빛난다. 그들이 던지는 메시지는 크고도 넓다. 최명길은 자신이 작성한 항복 문서를 김상헌이 찢어버리자 조각들을 주워 담으며 이렇게 말한다. “조정에 이 문서를 찢어버리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 또한 나 같은 사람도 없어서는 안 된다.” 상대의 다름을 이해하고 각자의 역할과 입장을 존중한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장면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김준동 논설위원 jdkim@kmib.co.kr
[여의춘추-김준동] 최명길과 김상헌의 화해
입력 2017-10-19 1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