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그녀의 타락이 슬픈 이유

입력 2017-10-20 00:00

번역은 엉덩이로 하는 작업이다. 학사와 석사, 박사과정을 전부 이 땅에서 마친 내가 그 흔한 미국 유학 한 번 다녀오지 않은 ‘비루한’ 스펙에도 불구하고 겁 없이 번역에 도전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그 때문이다.

‘교회 다시 살리기’, ‘기초생명윤리학’, ‘생명의 해방’, ‘작은 교회가 아름답다’, ‘아웅 산 수 지, 희망을 말하다’, ‘낯선 덕’, ‘과학의 윤리’ 따위의 책들이 그동안 내가 혼자서, 또는 다른 이와 함께 옮긴 책들이다. 전공이 전공이니만큼 윤리 관련 서적이 대부분이고 나머지는 기독교의 개혁에 관한 것이다. 다만 ‘아웅 산 수 지, 희망을 말하다’는 예외다. 이 책은 여러 모로 내 번역목록에서 엇박자를 타는데, 그럼에도 그 책과 인연을 맺게 된 데는 나의 오지랖이 한 몫을 했다.

그러니까 2010년 봄의 일이다. 북코리아출판사 대표로부터 연락이 왔다. 아웅산 수지 여사의 책을 번역할 적임자를 소개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가급적 정치학이나 사회학, 역사학을 전공한 여성학자 중에서 찾아봐 달라고 했다. “네. 그럴게요.” 흔쾌히 대답한 게 화근이었다. 안면이 있는 정치학자, 사회학자, 역사학자 모두 시간이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래서 내가 떠안게 됐다. 2009년에 그 출판사에서 나온 나의 논문집이 잘 팔리지 않는 데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책을 번역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저자와 사랑에 빠진다. 저자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으면서 단순히 돈 때문에 번역을 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렇게 영혼을 담지 않은 노동이 건강할 리 없다. 그 책을 번역하면서 나 역시 아웅산 수지 여사와 사랑에 빠졌다. 평범한 가정주부에서 미얀마 민주화 투쟁의 상징이 되기까지 ‘가택연금’의 아이콘이 된 그녀의 인생은 감동 드라마 자체였다. 1991년 노벨평화상 수상, 2002년 유네스코 인권상 수상, 2009년 국제엠네스티 ‘양심대사’상 수상, 2011년 타임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지명의 영광이 절대 과장이 아니다 싶었다. 이렇게 멋진 여성이 내는 ‘희망의 목소리’를 전달하는데 행여 번역이 반역이 되면 큰일이라는 부담감이 앞섰다. 미얀마에서 유학 온 학생들을 수소문해 인명과 지명의 자문을 구하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을 만큼 정성을 쏟았다.

그렇게 나의 열정의 일부를 바쳤던 그녀에 대한 지지를 나는 지금 철회한다. 아울러 할 수만 있다면 나의 번역 목록에서 그 책을 당장이라도 지워버리고 싶다. 왜냐하면 최근 미얀마에서 자행되고 있는 로힝야족 인종청소에 대한 그녀의 말은 결코 ‘희망의 목소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번역한 책에서 시종일관 불교의 자비 사상에 근거해 ‘비폭력 정신혁명’을 강조했던 그녀가 어찌 이리 매정한 폭군으로 전락했을까. 예수의 산상수훈까지 들먹이며 ‘자기희생’의 고귀함을 잘도 떠들어대던 그녀가 어찌 저리 몰인정하게 남의 희생을 조장할 수 있는가. 자신이 속한 인종 혹은 민족만 귀하고 다른 소수민족은 함부로 증오해도 된다는 마음보로 어찌 지도자 노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로힝야족이 어쩌다 미얀마에 들어와 살게 됐는지, 그 구구한 역사를 들먹이려는 게 아니다. 나는 다만 한때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나 우리나라의 김대중 대통령과 나란히 거론되며 ‘아시아의 위대한 여성 지도자’로 추앙 받던 한 여성의 타락이 못내 서글픈 것이다. 아마도 권력에 대한 의지 때문이리라. 그러나 그런 정치공학의 설명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보다는 ‘초월’이 없는 종교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예수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높이 쳐 있던 칸막이를 허물어뜨렸다. 여자니 남자니, 종이니 주인이니 하는 차별도 예수 앞에서는 힘을 못 썼다. 예수는 ‘초월’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 삶에서 그런 ‘초월’에 기댄 지도자를 찾기란 불가능한 꿈일까. 땅의 질서에 무릎 꿇지 않고 당당히 하늘의 뜻을 받드는 지도자가 그립다.

구미정(숭실대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