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기자-이경원] 헌재를 생각한다

입력 2017-10-18 18:30

“이곳, 빨리 채워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최근 헌법재판소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손가락이 조직도의 빈칸을 향했다. 9줄로 된 재판관 전속연구관 현황의 마지막 줄이 하얗게 비어 있었다. “사퇴 요구를 들은 권한대행의 마음은 어땠겠습니까. 하지만 그러면 재판관이 7명만 남게 됩니다.”

헌재는 지난 30년간 한국사회에서 헌법 최종 해석기관의 역할을 수행했다. 법률의 위헌성을 밝히고 주요 공직자의 탄핵 여부를 심판하는 일, 국가기관 간 권한 다툼을 조정하는 일이 모두 헌재 몫이었다. 최고법인 헌법으로 벌어지는 재판은 법률가들도 어려워했다. 그 고통 끝에 헌재가 사회에 결정문을 내놓으면 논리와 문장 양쪽에서 아름답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과연 이 사회는 헌재를 소중히 여겨 왔던가. 헌재 앞 일부 시위행렬이 입으로 외치는 건 ‘정의’였지만 들어 보면 ‘정치’였다. 장기화하는 재판관 공석에 헌재가 애면글면할 때 정치권에서 들리는 말은 ‘협상카드’ 따위였다. 표현의 자유를 넓혀온 헌재라서 안심이었을까, “헌법재판소가 없어져야 한다”는 말이 코미디 프로가 아닌 법사위원석에서 나왔다.

김이수 헌재소장 권한대행이 지난 13일 끝내 보고하지 못한 업무현황에는 ‘재판소장 1명 결원’이란 말이 있었다. 불과 300여명의 인력이 올 들어 8월까지 1656건의 심판사건을 처리했다는 내용도 담겼다. 그 가운데에는 이제 세계가 연구하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심판도 있다.

비단 탄핵심판뿐일까. 헌재는 ‘사회적 관심사안’을 소장에게 따로 보고해 왔다. 국정농단과 안보 문제가 시끄럽던 올해에는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배치 승인이 생존권을 침해했는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작성이 위헌적 공권력 행사였는지, 2018년 대학수학능력시험 문항 70%가 EBS와 연계되면 교육권 침해인지 가려 달라는 등의 문제였다고 한다.

이런 난제들 앞에선 식견과 헌법수호 의지를 검증받은 재판관들도 괴로움을 토로했다. 결정에 반발이 크면 마음이 불편하고, 공부하면 할수록 확신하기 어려워지더라는 겸손한 말을 들은 적도 있다. 그나마 파장 큰 선고를 할 땐 성직자처럼 살아야 하는 게 ‘아홉 현자’의 운명이었다.

지난 16일 재판관들의 헌재소장 지명 촉구는 어쩌면 기삿거리라고 할 수 없었다. 기사를 실컷 쓰고 돌이켜보니 재판관들은 채워져야 할 자리를 채워 달라고 당연한 말을 했을 뿐이다. 난제에 도전할 재판관들이 상식을 놓고 회의했다니 사회적 손실이다. 새 재판관 후보자의 지명까지 너무 오래 걸렸다.

이경원 기자 neosar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