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차은영] 외환위기 20년의 교훈

입력 2017-10-17 18:30

다음달이면 1997년 외환위기 20년이 된다. 돌이켜보면 그 당시에도 경고음이 울리고 있었지만 반도체 호황에 현혹되어 위기감을 직시하지 못했었다. 95년에 국제신용평가사가 국가신용등급을 상향조정했고 성장률이 8.9%에 달했다. 그 다음해인 96년에 국가신용등급은 한 등급 더 상향 조정되었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으로 들떠 있었다. 잘 나가는 반도체 덕분에 수출은 호황이었고 여기 저기 나타나는 적신호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정부는 긴축 거시경제정책을 실시하고 각 분야에 개혁을 감행함으로써 기업부실을 털어내고 안정적 금융시스템의 정착 등을 통해 외환위기를 성공적으로 벗어나게 되었다. 그 결과 외환보유액은 97년 말 기준 약 204억 달러였지만 2017년 8월 말 기준으로 약 3848억 달러로 20배가량 증가하였고, 단기외채비율도 97년 658%에 육박했지만 올 6월 말 기준 30.8%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20년 동안의 양적 개선에도 불구하고 저성장기조의 고착화와 경기둔화 경고음이 여전히 울리고 있다. 우선 한국 경제를 이끌어온 제조업의 평균 가동률이 지난 8월 말 기준으로 72%로 나타나 97년 말 79.1%보다 더 감소했다. 수출경쟁력의 감소와 제조업이 활력을 잃어가고 있음에도 반도체에 가려 감지하지 못하는 데자뷰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20년 전에 비해 더 악화된 가계부채는 97년 약 211조원에서 지난 6월 말 현재 1388조원으로 거의 7배나 증가하였다. 국내총생산 대비 국가채무 비율은 97년 말 기준 11.4%였지만 2017년 말까지 40% 가까이 증가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8월 말 현재 청년실업률은 9.4%로 97년의 5.7%보다 높고 외환위기 이후 가장 높았던 99년의 9.9%에 근접하고 있다.

중국의 사드보복 조치와 북한의 핵 위험이라는 대외리스크가 증가하고 미국의 금리인상이 가시화되면 금융시장에서 자금 이탈은 빠른 속도로 나타날 수 있다. 한·미 통화스와프는 2010년, 한·일 통화스와프는 2015년에 종료되었고, 한·중 통화스와프만 겨우 연장한 상태에서 외환위기가 본격화되면 외환보유액의 급격한 감소를 완충시켜줄 장치가 턱없이 부족한 상태다.

작금의 어려운 경제 상황에서 4차산업혁명위원회라는 이름도 무시무시한 새로운 위원회가 또 출범했다. 소득주도성장을 위해 일자리위원회를 만들더니 혁신성장을 위해 4차산업혁명위원회가 만들어진 것이다. 혁신성장은 혁신적인 창업과 신산업 창출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는 성장전략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증명되지 않은 임금주도성장이론을 근간으로 한 소득주도성장정책의 이름 아래 시행된 것은 최저임금 일방적 인상, 비정규직의 일률적 정규직화, 정부 주도의 인위적인 공공부문 일자리 창출 등이다. 자영업자들과 기업들에 견디기 어려운 부담을 초래하면서 노동계의 기득권을 옹호하고 세금을 방만하게 사용했지만 소비 진작과 경기회복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위기가 다시 닥친다면 막아낼 재정건전성도 위태롭다. 과거 정부들이 해온 창업지원, 벤처중소기업지원 정책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내용을 혁신성장이란 화려한 레토릭(수사)으로 포장해봐야, 정부가 주도하는 혁신의 결과는 전 정부의 창조경제정책 실패와 별반 차이가 없을 것이다.

혁신을 통한 성장은 개혁에서 시작돼야 한다. 외환위기 당시 기업과 금융부문의 개혁은 어느 정도 성과를 보였지만 공공부문과 노동 개혁은 기득권 저항에 막혀 무력화됐다. 노동시장의 개혁 없이는 기업의 혁신과 경쟁력 회복을 통한 지속적인 성장은 요원할 뿐이다. 특히 자본과 기술력 그리고 시장을 갖고 있는 대기업을 적대시하기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해, 아이디어는 있지만 다른 모든 것에서 열악한 스타트업과 벤처기업 창업을 효과적으로 지원하는 정책 방향이 바람직하다. 아이디어와 창조성은 자유로부터 잉태된다. 기업의 자유로운 활동을 제한하는 규제는 개혁돼야 한다.

차은영(이화여대 교수·경제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