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 발생한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정부와 서울시는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당시 박근혜정부는 원전 증설, 석탄화력발전소 확충 등 기존 에너지 정책을 고수했다. 반면 서울시는 탈원전을 선택했다. 시와 시민, 전문가들이 모여 논의를 시작했고 서울시민들의 힘을 모아 원자력발전소 1기라도 줄여보자는 목표를 세우고 2012년부터 ‘원전하나줄이기’ 사업에 착수했다.
그렇게 5년이 지나 서울시는 올해 에너지 절약과 신재생에너지 생산으로 원전 2기를 돌리지 않아도 되는 분량의 에너지를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염태영 수원시장은 “원전하나줄이기가 한국 사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고 평가했다.
태양광 미니발전소 설치, LED 조명 교체, 빌딩 에너지효율 제고 등 100여개 사업으로 구성된 서울시의 원전하나줄이기 사업은 다른 지방자치단체들로 확산되고 있고, 해외에서도 주목하고 있다. 서울시에서 원전하나줄이기 실행위원장을 하던 안병옥씨는 환경부 차관으로 발탁돼 문재인정부의 탈원전 정책을 주도하고 있다.
도시재생 뉴딜사업도 서울시에서 시작된 사업을 정부에서 수용해 국가사업으로 삼은 경우다. 국토교통부는 앞으로 5년간 50조원을 투입해 전국 500여곳에서 도시재생 뉴딜사업을 벌인다는 계획이다.
도시재생은 사실 박원순 서울시장의 핵심 사업이다. 박 시장은 철거와 재개발 위주의 도시개발 방식 대신 원주민 주거 안정에 초점을 맞춰 낙후된 동네를 재정비하고 산업적 거점을 조성하는 도시재생을 도입했다. 서울시는 도시재생본부를 설치하고, 종로구 창신·숭인지역을 비롯해 낙원상가 일대, 창동·상계, 성수동, 서울역 일대 등 서울시내 27곳에서 도시재생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탈원전과 도시재생 외에도 찾동(찾아가는동주민센터), 환자안심병원,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화, 공공임대주택 확충 등 많은 서울시 사업들이 문 정부에서 국가정책으로 채택됐고 다수의 서울시 인사들이 정부와 청와대로 들어갔다. 이 때문에 ‘문재인·박원순 공동정부’란 말이 나오기도 했다. 서울시 정무부시장을 하다가 청와대로 간 하승창 사회혁신수석은 “원전하나줄이기, 도시재생 등 서울시 정책들은 검증이 다 된 것들이라서 전국화하기가 쉽다”고 말했다.
지방정부에서 시작된 정책들이 국가화, 전국화되는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무상급식, 청년수당, 젠트리피케이션, 생활임금, 1인가구, 50대 독거남, 50플러스 세대(50세 이상 세대), 반려동물 등은 지방정부에서 발굴한 ‘지방발 의제’들이지만 최근 몇 년 사이 국가적 주제로 부상했다. 지방정부가 새로운 정책들을 개발하고 이것이 타 지방정부와 중앙정부로 확산되는 구조가 일반화되고 있다. “정책 면에선 이미 지방분권이 대세”라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지난 여름 히트를 친 ‘폭염 그늘막’도 마찬가지다. 횡단보도 등에 설치해 행인들이 잠시나마 햇빛을 피할 수 있게 한 폭염 그늘막은 지난 2013년 동작구에서 처음 선보인 뒤 서울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올 여름 서울에서만 23개 자치구에서 그늘막을 설치했고 부산과 인천, 대구, 경기 등으로도 확산됐다.
폭염 그늘막은 법적 근거가 없는 시설물이었지만 시민들의 호평 속에 전국으로 퍼져나가자 국토교통부는 지난 8월 폭염 그늘막을 도로법에 따른 도로 부속시설물로 인정하기로 했다. 서울시는 그늘막 설치와 운영에 관한 가이드라인을 마련했다.
폭염 그늘막의 최초 제안자로 알려진 이는 문충실 전 동작구청장이다. 땡볕 아래서 땀을 뻘뻘 흘리며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는 동네 어르신들을 보고 동주민센터에 보관 중이던 행사용 텐트를 꺼내 설치한 게 폭염 그늘막의 시작이었다. 문 전 구청장은 한 인터뷰에서 “현장에 답이 있다”며 “현장에서 주민과 시민이 어떻게 생활하는지를 살피면 해답이 나온다”고 얘기했다.
주민들과 밀착해 있는 지방정부는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하는 게 빠르다. 정원오 성동구청장은 임대료가 너무 올라 동네를 떠나고 싶다는 상인들 얘기를 듣고 젠트리피케이션 방지 대책을 만들기 시작했다. 성동구는 현재 젠트리 문제를 고민하는 전국 지방정부들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고 있다. 성동구가 시작한 젠트리 대책은 서울시 정책이 됐고, 정부 정책으로 채택됐다.
김수영 양천구청장은 50대 독거남이 고독사에 가장 취약하다는 문제를 발견해 올 초 전국 처음으로 전수조사를 실시했고, ‘50 스타트 센터’ 설치 등 이들을 지원하기 위한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50대 독거남 문제는 이후 여러 지방정부에서 주목하는 이슈가 됐다.
실질적 생활을 보장한다는 개념의 생활임금은 2013년 성북구가 처음 시작한 이후 지방정부와 공공기관을 넘어 민간으로도 확대되고 있다. 강동구가 시작한 길고양이 급식소 등 반려동물 대책, 관악구의 1인가구 대책 등도 전국화되고 있다.
자치분권지방정부협의회 회장을 맡고 있는 김영배 성북구청장은 “주민들과 가장 가까이 있는 지방정부가 주민들의 열망과 고통에 가장 반응성이 높을 수밖에 없다”며 “특히 민선 5∼6기에 젊고 준비된 정치인들이 지방정치 영역으로 대거 진출하면서 복지, 일자리, 교육, 에너지 등 생활이슈들이 많이 개발되고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고 말했다.
김 구청장은 이어 “국민들은 나라가 발전하고 경제가 성장했지만 자신의 삶은 변하지 않는다는 갈증과 답답함을 안고 있다. 또 정치가 자신의 삶을 바꾸는 데로 나가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해 한계를 느끼고 있다”면서 “삶과 생활의 요구에 반응하는 지방정부에 대한 주민과 유권자들의 지지가 중앙정부에도 영향을 미치고 이를 통해 생활정치가 새로 부상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정희윤 서울연구원 상생발전분권연구센터장도 “앞으로 점점 더 생활정치에 대한 요구가 커질 수밖에 없다”며 “중앙정부도 국민들의 마음을 얻어야 하니까 자꾸 생활의제들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고, 그러다 보니 지방정부들이 만들어놓은 사례들을 참고하는 경우가 많다”고 분석했다. 그는 또 “주민들은 생활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사업, 피부에 와 닿는 서비스를 원하는데 중앙정부는 그런 현장밀착형 사업을 해본 적이 없다. 전국 대상의 제너럴한 사업만 해왔기 때문”이라며 “생활의제는 현장성, 신속성, 전문성을 요구하는데 주민들과 가까이 있는 지방정부가 잘 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
[‘주민의 시대’를 여는 키워드, 지방분권] 지자체 ‘생활밀착형 사업’ 중앙정부서 벤치마킹
입력 2017-10-17 2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