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균 연령 89세. 서울 종로 쪽방촌의 터줏대감 할머니 삼총사가 16일 오전 강원도 속초시 설악케이블카 주차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할머니들이 단장한 모습은 마치 소풍을 떠나는 소녀들의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이야∼ 신난다.” 휠체어에 앉아 있던 김옥순(89) 할머니가 외쳤다. 환한 표정 이면엔 김 할머니의 먹구름 같은 지난 인생이 담겨 있다. 일제강점기, 고작 13세에 불과했던 그는 근로정신대로 끌려갔다. 해방 후 귀국했지만 고향인 전북 군산에 선뜻 발길이 닿지 않았다. “왠지 갈 수 없었어. 그 뒤로 지금까지 서울에서 쪽방촌만 전전하고 있다면 믿어져? 고단한 세월이었네….”
김 할머니뿐만 아니라 올해 구순에 접어든 이복순 할머니와 미수(米壽·88세)를 맞은 김만복 할머니도 마찬가지다. 저마다 아픔과 사연을 지닌 채 쪽방촌을 찾았다. 이들이 쪽방촌에 터를 잡은 햇수만 100년이 훌쩍 넘는다.
빨간색 모자에 청바지를 입은 멋쟁이 김만복 할머니는 젊었을 때 설악산을 종종 찾았다. 고향이 그리워서다. 함경남도 출신인 그는 6·25전쟁으로 가족과 생이별을 해야 했다. “그래도 강원도에 오면 고향과 가까우니 그리움이 덜해. 그래서 가끔 왔지. 지금은 남편도 죽고, 사는 것도 이러니 스스로 올 수가 없네. 목사님이 초대해 주니 너무 고마워.” 아픔과 회한이 가득한 지난날을 이야기하면서도 김만복 할머니는 특유의 밝은 표정을 잃지 않았다.
삼총사 가운데 가장 거동이 불편했던 이복순 할머니 곁에는 두 명의 도우미가 필요했다. 이 할머니는 영락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고 했다. “한경직 목사님이 계실 때부터 영락교회를 다녔죠. 오래 됐어요. 지금도 교회에 가면 그렇게 마음이 편해요. 예수님의 집이라서 그런가 봐요.”
케이블카의 힘을 빌려 권금성 정상에 도착한 일행은 서로를 부축하면서 대합실 밖으로 나왔다. 가을에 젖어드는 설악산 자락과 마주한 그들 사이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산 내음을 풍기는 산바람이 할머니들의 귀밑머리를 스쳤다. 나뭇잎마다 아직 단풍이 깊이 들진 않았지만 할머니들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설악산에 섰다는 것,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벅찬 표정이었다. 설악산 자락에서 잠시나마 고된 일상을 잊은 듯했다.
할머니들을 부축한 도우미들도 뿌듯한 모습이었다. 도우미로 나선 임성욱(63)씨는 “오랜만에 여행을 와서 나 자신도 좋지만 할머니들에게 도움을 드릴 수 있다는 사실이 더 행복하다”면서 “앞으로도 쪽방에서 생활하는 어르신들을 부모님처럼 돌보고 싶다”고 소감을 전했다.
이번 여행은 ‘프레이포유’(대표 손은식 목사)가 기획했다. 소외 이웃을 위한 기도사역을 펼치고 있는 이 단체가 ‘세상의 무관심과 냉대 속에 살아가는 할머니들에게 추억을 선물하자’는 취지에서 마련했다. 도우미로 동행한 사역자들은 과거엔 노숙인이었다. 이들은 손 목사를 만난 뒤 노숙인 생활을 접고 자신들보다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사역에 동참하고 있다.
화사한 색으로 익어가는 설악산 자락에서 할머니들의 바람은 소박했다. “내년 가을에도 설악을 다시 한번 찾아오고 싶다”는 것이었다. 살아온 날들보다 살아갈 날들이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의 절박한 바람이기도 했다.
손 목사는 “소외된 이웃을 위한 기도사역과 더불어 쪽방촌 어르신들, 노숙인들과 함께 매년 두 차례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서 “함께 웃고 기쁨을 나누는 게 우리 사역의 중요한 목표”라고 소개했다. 짧은 여행을 마친 쪽방촌 할머니 삼총사는 일상 속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속초=글·사진 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종로 쪽방촌 ‘할머니 삼총사’ 설악산 오르다
입력 2017-10-17 00:00 수정 2017-10-17 10:46